[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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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49. 가난한 시인의 유산

조용히 왔다가 소리 없이 가는 술꾼 중에 한 사람이 고형렬 시인이다.

탑골에는 대개 늦은 시간이 돼야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로 오후 10시 이후에 오는 사람이 많아 오후 8시께면 손님을 찾아보기가 드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간쯤에 고형렬 시인이 혼자 찾아왔다. 주로 여럿이 몰려올 때 같이 오던 시인이었으므로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기대를 훌쩍 지나쳤다.

"집에 가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너무 일찍 왔나. 하기사 매번 밤늦게

온 기억만 있어서‥.. "

나는 그 밋밋한 대답에 웃음도 났고 왠지 정겨워지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조금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올거에요. "

맥주 몇 병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이 생각 저 생각 떠올랐고 마치 선보는 사람처럼 머쓱해졌다가 불쑥 고향을 묻고 말았다. 고형렬 시인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고향은 전남 해남이었지만 나는 강원도 속초에서 나고 자랐지. 서울 오기 전에 면에서 일하기도 했고. 처음에는 서울이라는 데가 정이 안붙어서 고생했는데 이젠 조금씩 익숙해져가. 복희는 어디야. "

"저는 원래 서울이에요. 동대문구 창신동 산동네에서 나고 자랐지요. "

말을 하고 보니 점차 우스워졌다. 여간해서 그렇게 다정하게 고향을 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면서 생긴 마음의 빈자리를 돌아보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점잖은 신사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고(故) 채광석 시인도 그런 경우다. 채광석 시인은 1987년에 작고했다. 탑골의 문을 열 때부터 여럿과 함께 찾곤 하던 채 시인의 유난히 큰 입과 희디흰 치열이 눈에 선하다.

그것은 탑골에서 채 시인이 말도 많이 했고 노래도 많이 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크게 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야말로 함박웃음이었다.

그렇지만 채 시인은 내가 알기로 1987년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 부를 만큼 많은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채 시인은 문인들 뿐만 아니라 문화인, 나아가 노동운동 곳곳에 많은 지인들이 있었으며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여 당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6.29선언이 나오고 사회가 민주화가 되어가는 모양을 갖춰가고 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운명의 그날도 아직은 선언에 불과한 6.29선언을 실질적인 민주화의 디딤돌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으로 후배 문화인들과 밤늦도록 토론을 벌이다가 귀가하던 신새벽에 그 참변을 당했으니….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채 시인의 호주머니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문화인장으로 치뤄진 세브란스 병원에서 후배 시인이 오열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한 조사를 들으며 알았다.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다 바쳤지만 자기 가족을 위해선 아무런 유산이 없던 사람, 저승길의 노자가 동전 몇 개뿐이었던 시인.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만한 자유를 누리는 것도 그런 이들의 희생 덕분은 아닌지….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고향 안면도에 오는 7월 16일 세워진다고 한다. 사후 13년 만에 세워지는 시비가 해풍에 젖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복희 <전'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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