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진정한 임원은 전무부터 … “임원되니 황야에 선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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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임원은 ‘미래의 CEO 후보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임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 임원이 아니더라는 귀띔이다. 상무에서 전무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명실상부한 CEO감으로 대접받는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LG 등 주요 대기업들은 전무급 심사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

연말은 기업 임원에게 희망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잔인한 시기다. 승진의 기대에 부풀어 잠 못 이루는 임원이 있는가 하면 해고의 두려움에 떨며 잠을 뒤척이는 임원도 많기 때문이다.

임원 인사가 있던 하루 전날인 15일 밤. 삼성의 한 임원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인들과 술 한잔을 했다.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아 승진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유임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재임용을 하지 않을 경우 사장이 인사 며칠 전부터 해당 임원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한다. 이 때문에 사장에게 전화를 받은 임원(해고)과 전화를 받지 않은 임원(유임 또는 승진)으로 나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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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는 삼성과 반대의 경우다. 수시 인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차는 한직으로 내보냈던 임원도 다시 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최고위층에서 활용하는 게 바로 전화다. 현대차 임원 사이에 최고위층에서 다시 중용하려 할 때 연락이 잘될 수 있도록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지 말라는 농담이 돌기도 한다.

◆‘자동차는 차관급, 퇴직 후에도 대우’=임원이 되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용차다. 삼성의 경우 상무가 기아 오피러스, 현대 그랜저, 르노삼성 SM7 등 배기량 3000cc 미만(4000만원 이내)의 차를 고를 수 있다. 검찰에서 보직의 ‘꽃’으로 불리는 검사장급 간부가 타는 차량과 같다. 관공서의 차관급에 해당한다.

다만 삼성의 상무는 전용 기사나 비서는 없다. 전무가 돼야 독립 공간이 제공되고 전용 비서가 나오며 직무에 따라 기사가 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삼성에서 진정한 임원은 전무부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삼성에서 전무급 이상은 전 임직원의 0.2%인 400여 명에 불과하다.

올 초 승진한 삼성 임원이 가장 선호한 차는 오피러스였다. 새로 차를 구입한 임원 56%가 이 차종을 선택했다. 전무가 되면 현대 에쿠스 등 배기량 4000cc 미만, 부사장은 그 이상급의 차량이 제공된다. LG그룹의 경우 부회장 차량은 에쿠스 4500 이상, 사장은 에쿠스 4500, 부사장 에쿠스 3300, 전무급 제네시스 3300, 상무급 그랜저 TG 2700 등 차종이 정해져 있다. 이번에 대규모 임원 인사를 한 SK도 상무는 SM7급(배기량 2000~2700cc), 전무는 오피러스급(배기량 3000cc), 부사장 이상 에쿠스급(배기량 4000cc)의 승용차를 고를 수 있다. 외제차도 동급에서 선택할 수 있는데 직전 임원인사 때는 인피니티 브랜드를 찾는 임원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업무 부담은 부장 때의 4~5배’=임원은 늘어난 혜택만큼 부담도 가중된다. 부장일 때는 한 개의 부서만 맡으면 됐지만 임원이 되면 2~3개의 부서를 맡아야 한다. 여기에 각 부문 성과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업무 부담은 4~5배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또 실적이 나쁘면 임용된 지 몇 달 만에 옷을 벗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임원에게 다가오는 압박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게 임원의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몇 년 전 상무가 된 삼성의 한 임원은 “부장 때도 실적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해고에 대한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며 “임원이 되니 온실에 있다가 황야에 홀로 선 느낌”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사에서 모기업의 신사업 담당 임원으로 승진한 한 대기업 임원은 “임원직이라는 것은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임금을 받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며 “자리가 불안한 데다 스트레스까지 많아 요즘엔 임원에 빨리 오르는 걸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창규·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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