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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정권, 박헌영에 “미제의 간첩” 사형선고 후 총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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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49년 평양에서 치러진 박헌영과 두 번째 부인 윤레나의 결혼식에서 김일성이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하고 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1955년 12월 15일 북한의 최고재판소는 특별재판을 통해 박헌영에게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했다. 재판의 공식 명칭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박헌영을 제외한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7일 후인 동년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던 반면 박헌영은 2년이 더 지난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었다. 두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박헌영은 1956년 7월 총살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판결문에 의하면 박헌영은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일본 경찰에 비밀조직을 모두 자백했으며,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사건 등을 배후에서 조종, 미군정에 대해 반대활동을 지시했던 박헌영이 실제로는 하지 중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공산당을 친미의 방향으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 조직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노출시켜 소위 ‘혁명역량’을 파괴하였다고 판시했다. 또 1946년 월북한 이후에는 이승엽과 이강국을 통해 미군정에 북한의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2년 9월 무장 쿠데타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고 돼 있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인 언더우드와의 관계, 1945년 9월 9일 미군 상륙을 앞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였다는 점 등이 판결문 속에 나타나는 것도 주목된다(재판 발췌문은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에 수록).

1945년의 시점에서는 비밀조직이 아니었던 조선공산당의 책임자로서 미군정 책임자를 만난 사실이 모두 간첩 활동으로 돼 있다는 점은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직후 박헌영이 중국의 고위 관리에게 북한 정권을 전복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친중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는 최근 중국에서의 증언들을 감안한다면, 박헌영과 남조선노동당 계열 인사들의 북한정부 전복 움직임이 사실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미국의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재판 시점과 판결문 속에 나와 있는 전쟁을 전후한 시기 38선 이남에서 있었던 공산당 활동의 실패 등을 고려한다면, 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를 읽을 수도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