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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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42. 문인들의 대합실

얼마 전 민주화를 위해 불처럼 태풍처럼 살다가 안타깝게 타계한 조태일 시인은 유신시절 밤마다 장독대에 서서 '유신독재 타도' 를 외치다가 당국에 혹심하게 당한 '전설' 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장독대 사건' 이라 불렀다.

이도윤 시인이 나름의 반항을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방뇨로 표현한 것을 '광화문 사건' 으로 부른 것도 이런 의식의 연장선상에서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웃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틋한 친밀감과 잘못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다소 우습게 표현된 바 없지 않지만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당시 시인들의 투박하고도 건강한 초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보니 많은 지역문인들이 떠오른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큰 행사를 치를 때에는 지역의 문인들이 대거 서울에 왔다가 밤차를 타고 내려갔지만 떠나기 전에 탑골에 모여 서로 회포를 풀곤 했다.

자연 각 지역 연락간사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부산지역은 최영철.이적 시인, 마산.창원은 이소리 시인, 대구지역은 김용락 시인, 청주는 김희식.김성장 시인, 대전은 이강산 시인, 전주는 박남준 혹은 박배엽 시인, 광주는 임동확 시인 등이었다.

이들은 늘 지역의 중견.중진 문인들을 모시고 왔다.

가령 광주의 이명한.문병란 시인, 전주의 정양.최형.이광웅 시인, 부산의 임수생 시인, 창원의 이선관 시인, 밀양의 고(故)이재금 시인, 대구의 이하석 시인, 청주의 도종환 시인, 속초의 이상국 시인, 울산의 김태수 시인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이들은 술좌석에서도 문학의 민주화라든가 지역문화운동 혹은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고민하곤 했다. 서로 성공담을 청해 들으며 때론 부러운 표정도 되고 때론 한탄하기도 했다.

탑골에서 서로 나누는 얘기를 귀동냥하다보면 이들이 없다면 전국적인 행사를 열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원들을 동원하고 행사의 내용을 채우고 또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이 가끔 데리고 온 지역 신인 문인들로 탑골의 술자리 또한 풋풋하게 전국 규모가 되어갔다.

지역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이들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젊은 문인들이 모이면 그야말로 활력이 넘쳤다.

청주의 김희식 시인이 부르는 판소리나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고 김용락.최영철.유명선 시인등의 트로트 등은 언제나 재미 있었다.

물론 이들은 피가 뜨거워 당시의 운동가를 많이 불렀고 가끔씩 싸움판도 벌였다.

하지만 그 싸움들은 서로의 애정과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이었으므로 언제나 벅찬 감동으로 귀결되었다.

한쪽에서 서로 언성을 높여 싸워도 그 옆에선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술을 마셨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술판이라 여겼음직하다.

그런 때에 고 채광석 시인은 자신의 시에 즉흥적인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는데 그 곡은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제 어떻게 올라갈지 아무도 몰랐고 언제 끝날지는 '며느리도 모를' 만큼 절묘했다.

큰 입 그리고 유난히 하얀 이가 감은 눈과 함께 이루어내는 괴상한 노래는 많은 사람들을 터무니없이 긴장시켰고 노래가 끝난 뒤에는 굉장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듣기에도 민망한 노래가 빨리 끝난 것이 적잖이 안심돼 치는 박수 같기도 했다.

또한 거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박영근 시인이나 키가 장대 같았던 강세환 시인이 휘청거리며 부르는 노래가 곁들여지면 한바탕의 난장이 벌어졌다.

80년대말 순정한 시대적 양심과 야성 넘치는 글들로 들불같이 일어났던 그 민중.노동.지역 문인들은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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