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국회의원이라는 직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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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관.부총리에 국회의원을 두루 거친 한 정치인에게 어떤 자리가 가장 좋더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서슴지 않고 '국회의원' 을 꼽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릴 것은 다 누리는데 책임질 일 없고 신분보장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장관 자리가 좋긴 하지만 책임도 그만큼 막중하고 잘못하다간 개각대상에 오른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어떻든 4년이라는 임기가 보장되는 것이다.

면책특권 덕분에 국회 안에서는 무슨 소리를 해도 괜찮고, 회의에 나가든 말든 간섭하는 사람 없고, 나랏돈 들여 외국 나가면 공관원들이 칙사대접하고…. 이러니 국회의원이 좋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요즘 그런 호시절이 끝나가는 것 같다. 시민단체들이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고 언론은 의원들 점수를 매긴다.

이제 낙선운동 대상에 오르면 십중팔구 공천받기도 어려울 것이니 앞으론 의정 생활도 이 눈치 저 눈치 안볼 수 없게 됐다.

더군다나 최근에 세계 1백30여개국 의회를 대상으로 조사한 세계의원연맹(IPU) 보고서를 보면 외국에서는 국회에 자주 안 나가면 세비를 깎는 등 처벌을 하고 심지어 의원직 박탈까지 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니 멋대로 결석하고 법안 제안 한 건 안 해도 되던 유한(有閑)국회의원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됐다.

그래도 한국에선 국회의원 자리가 여전히 좋기는 한 모양이다. 평생을 별 직업을 갖지 않았던 정치인들의 재산상황을 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가신(家臣)이니 실세(實勢)니 해서 정치권 안에서 목소리 깨나 굵은 의원 중엔 수십억 재산가들이 수두룩하다.

국회의원 세비라는 게 연봉으로 쳐서 8천만원도 안되고 후원금이란 게 용처가 다 있는데 어떻게 그런 재산들을 모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재산들에 대해 국세청이 그 흔한 세무조사 한번 제대로 했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금배지를 따려고 기를 쓰게 마련이다. 어떤 당이든, 어떤 정치적 노선이든 상관이 없다. 의사당에 들어가는 게 장땡인 것이다. 이런 풍토 때문에 다선(多選)의원들은 존경받는 원로라기 보다 우리 정치의 모든 병폐를 두루 섭렵한, 퇴출대상으로 꼽히기 일쑤다.

그 오랫동안 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당을 거치고, 권력의 풍향을 향해 안테나를 잘 돌리고, 줄을 잘 선 것이 오늘의 '영광' 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이 된 8선 의원, 총리가 된 6선 의원들이 아무런 존경을 받지 못하고 해바라기니 뭐니 하며 비난만 받는 것도 그런 경력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초선들, 386 의원들도 얼마나 초심을 유지할는지 두고봐야 한다. 1988년 선거에서는 반군부 투쟁의 전사들이 제법 의사당에 들어왔다.

그들은 말 그대로 험난한 야당생활의 흔적을 알려주듯 어떤 이는 봉고차를 타고, 어떤 이는 아예 차가 없어 택시 타고 등청했다.

그런데 반년도 채 안돼 모두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친구들이 빌려주고, 아는 기업들이 알선해줬기 때문이란다. 이런 접대에 대해 국회차원에서 조사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IPU 보고서는 의원들에게 주어지던 정치인으로서의 특권들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국회의원이라는 것도 점차 풀타임의 '전문직업' 으로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IPU 보고서는 이 전문직업인들에게 품위를 유지하고 부패를 막을 '봉급' 규모와 그에 합당한 윤리적 강령.정치적 특권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의정 활동을 위축시킬 면책특권의 축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래도 그 특권을 방패 삼아 누군가 의정단상에서라도 정부의 권력남용에 대해, 검찰권의 정치적 왜곡에 대해, 언론과 환경 등 기본권의 침해에 대해 외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치를 이용한 치부, 권력과 결탁한 경제왜곡, 정치자금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횡행하는 정치부패를 방치할 때도 지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출.결석을 엄밀히 점검하고 의원들의 발언의 품위와 수준을 점검하는 윤리강령도 중요하지만 이런 '정치부수적 특권' 들을 없애는 게 급선무다.

국회가 만약 그들의 특권만 생각하고 이런 자체정화의 책임을 또 망각하게 되면 이 '전문직업인' 들을 고용한 유권자들이 리콜제(국민소환제)와 같은 것을 도입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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