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피곤한 개혁의 표본-의약 분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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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어떻게 섬뜩한 현실로 나타나는지를 한번 따라가보자.

못에 걸려 허벅지가 약 3㎝ 찢어진 사람이 있다. 피가 잘 멈추지 않아 동네 외과에 가 피부를 꿰매야만 한다.

이 경우 책정된 수가(酬價)는 6천7백10원으로, 기본진료비를 포함하면 1만60원 정도. 의료보험이 있으므로 본인이 실제 내는 돈은 1만원에 훨씬 못미친다.

그러나 찢어진 양복 바지를 세탁소에서 짜깁기하는 데는 보통 3만원 안팎이 든다. 고급 양복이라면 돈이 훨씬 더 든다.

피부병으로 생긴 고름을 닦아내는 이른바 드레싱의 수가는 보통 1천9백40원. 공항이나 백화점에서 구두를 한 번 닦는 비용 2천원보다 싸다.

사람이 병원에서 정상 분만을 할 때 적용되는 수가는 4만3천7백50원이다. 그런데 가축병원에서 개 새끼를 받는 데 드는 비용은 보통 15만원이다.

사람 값이 옷.구두.개 값보다 싸다. 펄쩍 뛸 이야기지만 의료 서비스에 관한 한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이 옷.구두.개보다 훨씬 소중하므로 사람이 손상됐을 때 지불하는 비용은 당연히 낮아야 하고, 그래서 누구나 서럽지 않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섬뜩한 현실은 어떤가.

초진의 경우 진료비는 대개 8천원 안팎이다. 이걸 갖고는 의사들이 마치 술집에서 손님 받듯하지 않고는 계산이 맞질 않는다.

그러니 종합병원을 찾은 환자가 약속 시간보다 30분.한시간을 더 기다려 의사를 만나도 고작 2~3분 보기가 일쑤다.

한번에 50만원씩 하는 데도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자기공명촬영(MRI)은 많은 경우 술집의 값비싼 바가지 안주나 같다. '안찍어봐도 그만인 경우가 많지만' 병원이 계산을 맞추려면 더 많은 환자를 MRI 통 속에 눕혀야 한다.

의사의 본업은 진료이건만 그간 약을 팔아 계산을 맞춰온 것도 마찬가지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약을 먹어주면서' 값싼 진료비를 벌충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다 동네 약국에서도 마음대로 약을 팔았으니, 우리는 졸지에 약을 오남용하는 국민이 되고 말았다. 항생제를 써도 세균이 죽지 않는 비율이 선진국 국민보다 다섯배나 높은 게 우리다.

여기에 더욱 섬뜩한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의약 분업으로 의사들이 약을 못팔게 한다고 하자 의사들이 집단 폐업을 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약사의 임의조제 근절, 의사 처방료 현실화 등 복잡한 명분을 내걸고 있으나 까놓고 말하면 약을 팔아 벌충하던 밥그릇이 날아가게 생겼'는 데도 정부든 누구든 "당신들은 의사 아니냐" 는 식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국무위원도 답답한 나머지 여당' 정책위 간부들'에 섬뜩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의약분업을 밀어붙인다는데, 잘못했다간 환자들이 무슨 위험과 불편에 처할지 모르고, 그랬다간 정권의 관리능력을 의심받을 것이며, 자칫했다간 현 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그때부터 시작될 수도 있으니 당에서도 좀 신중히 챙겨보라는 요지였다.

개혁이니 피로니 하는데, 의약분업만큼 어설프고 설익은 개혁의 표본도 별로 없다. 개혁의 명분만 내세웠지 개혁의 인프라부터 제대로 놓을 생각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갈등의 본질은 의료 서비스의 가격과 질.시스템의 문제인 데도 정부는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면서 "집단 이기주의에 엄정히 대처하겠다" 는 소리만 하고 있다.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일반 국민이나 의사뿐 아니라 정권에도 섬뜩한 현실로 다가오는 데도.

의약분업은 의사들의 진료행위에 대한 합리적 가격에서부터 찬찬히 풀어나갔어야지 "합의했지 않느냐" 며 우격 다짐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의보수가는 선진국들에 비해 매우 낮다. 진찰료의 경우 일본은 우리의 3배, 프랑스는 3.8배, 싱가포르는 6.5배나 된다.

개인이 부담하는 의료보험료율(소득의 3~5%)도 웬만한 나라의 절반이 채 안되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의료보장에 쓰는 돈이 형편없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보 재정이 부실하고, 의보수가는 낮으며, 국민들은 싸구려 진료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약을 먹어주고 MRI 찍으며 결국 낼 돈은 다 내는 꼴이 됐다.

의약분업을 해도 이같은 현실은 고쳐지지 않는다. 아니 더 심해질지 모른다.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현실을 외면한 채 명분만 좇는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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