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어 ‘초밤’이 결혼 첫날밤이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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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업으로 가르치는 이들 사이에서도 우리말의 이해와 독해가 허술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원로평론가 유종호(74·사진) 전 연세대 석좌교수가 국문학계의 연구 태도에 쓴소리를 던졌다. 최근 펴낸 문학평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에서 관련 사례를 일일이 들었다.

가령 정지용의 시 ‘촉불과 손’에서 마지막 행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에서의 ‘초밤불’을 보자. 지은이는 ‘초밤’이란 ‘evening’을 가리키는 시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정지용이 젊은 날 번역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의 ‘초밤별에게’로부터 근원을 찾는다. 그런데 모 교수의 해설서에선 ‘초밤’을 결혼한 첫날밤으로, ‘초밤불’을 결혼 초야를 밝히는 불로 해석하고 있다.

번역에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됐다. 박목월의 ‘임’에 다음 같은 대목이 있다. “기인 한 밤을/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어느날에사/어둡고 아득한 바위에/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요.” 여기에서 ‘가는’은 돌을 갈아 윤이 나게 한다는 뜻이라야 “임과 하늘이 비치”게 되나, 어느 영역본에선 ‘가는’을 ‘가다(行)’란 뜻으로 번역해놨다.

유 교수는 몇 해 전 수능시험에서 백석의 ‘고향’과 그리스 신화의 유사관계를 가정한 시험문제가 말썽이 된 사례를 들면서 “그런 해괴한 문제가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것” 역시 연구자들이 작품을 꼼꼼히 읽지 않은 탓이라고 꼬집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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