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다시 힘 주는 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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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루스벨트 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9명의 은행장과 라운드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대통령 앞에 놓인 전화기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통령님 참석을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전화를 통해 듣고 있습니다.” 모건스탠리 존 맥 회장의 말이었다. 골드먼삭스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이 거들었다. “하는 데까지 해봤습니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애초 이날 회동엔 12명이 초청됐다. 그러나 골드먼삭스 블랭크페인, 모건스탠리 맥과 씨티그룹 리처드 파슨스 회장은 현장에 가지 못했다. 이날 오전 공항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전화로 백악관과 연결했다. 오바마는 “전화를 해줘 고맙다”고 짧게 인사했다.

그러나 백악관 참모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현장에 오지 않은 세 명과 달리 9명의 은행장은 제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PNC은행 제임스 로 최고경영자(CEO)는 전날 오후 피츠버그에서 자가용을 이용해 워싱턴으로 갔다. 도중에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웠다. 차기 재무장관으로까지 거론된 JP모건 제이미 다이먼 회장도 자가용 비행기로 일찌감치 워싱턴에 도착했다.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케네스 체놀트 회장은 아예 기차를 이용했다.

이날 오바마는 12명의 은행장에게 강도 높게 중소기업 대출을 압박했다. 대통령 이야기가 끝난 뒤 은행장들은 앞다퉈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 발언의 무게는 지난해 10월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헨리 폴슨 재무장관이 은행장들을 불렀을 때보다 가벼웠다고 뉴욕 타임스(NYT)·월스트리트 저널(WSJ) 등 미국 언론이 전했다. 당시엔 하루 전 소집 통보를 받은 은행장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백악관에 모였다. 파산 위기에 몰린 은행장으로선 정부로부터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자금을 지원받는 게 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 뒤 입장은 뒤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참석하지 않은 세 명의 은행장은 TARP 자금을 갚은 뒤 임직원에게 거액 연봉을 주려다 논란을 빚은 장본인들이었다. 이번 백악관 회동을 두고 백악관과 월가의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백악관 로버트 깁스 대변인은 “여론을 이용한 압박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와 달리 월가는 “힘의 균형이 워싱턴에서 맨해튼으로 다시 넘어왔다”고 평가했다.

백악관의 발언 수위는 1년 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월가를 움직일 수 있는 미 정부의 지렛대는 오히려 짧아졌다. 정부 구제금융을 받은 대형 금융회사가 빚을 다 갚아버렸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이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산업 규제 움직임에 월가가 로비를 동원해 반대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지난주 미 하원을 통과해 상원으로 넘어간 금융개혁법안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압박이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다. 하원과 달리 상원은 금융개혁에 소극적이다. 정부 구제금융이란 족쇄에서 풀려난 월가도 그동안과는 태도가 달라질 공산이 크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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