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심사평

이번 응모작들은 소설은 이야기이긴 하되 '의미있는' 이야기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이 의미있고 없음을 판단하는 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박채란)은 남편과 아내가 규칙적으로 번갈아가며 화자 역할을 맡게 함으로써 독자들을 편안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문제는 독자들을 향한 배려가 지나친 나머지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착종성(錯綜性)마저 유지되지 못한 데 있다. 단조로운 데다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남편을 밤하늘의 별관측 매니어로 그려 놓은 것도 현실성이 약하다.

'나는 자란다'(박상숙)는 아기자기한 재미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소재가 낡은 데다 쥐잡기 모티프가 지나치게 길게 다루어졌다든가 소녀화자의 설정으로 인한 서술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든가 하는 문제점을 보였다. 소녀화자로서는, 부정(父情)을 지키려다 사고사를 당한 아버지를 비극적인 삶으로 충분하게 형상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성장 햄스터'(김민서)도 소설 읽는 재미와 긴장감을 안겨 주고 있으나 작중의 인물이나 상황과 햄스터의 존재가 잘 연결되지 않아 작품 전체가 사개가 맞지 않게 되었다. '하드 보일드'(김상우)의 경우, 주인공이자 화자가 놓인 극한상황을 부각시키려는 뜻에서 내보인 거친 어법이나 비정한 태도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감정이나 태도를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점이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작품 뒷부분에 가서 하드 보일드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주로 책이름을 들어가며 모색한 것은 현학적이면서 부자연스럽다. 사건소설의 씨줄과 관념소설의 날줄이 잘못 만난 형상이다. '밀랍인형, 세상을 조롱하다'(김덕희)는 모버레이터의 세계를 펼쳐 보인 점에서 이색적이고 참신한 면이 있다. 낯선 소재를 펼쳐보인 수준에서 멈추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건적 요소가 빈약하다. 모버레이터는 본질적으로 역동적이고 모험적인데 소설 자체는 소극적이고 얌전하기까지 하다. 제목도 작품내용과 어울리는 편이 아니다.

'키친 실험실'(장은진)도 내용과 제목이 썩 잘 어울린다고 보기 어렵다. 이 작품은 앞부분의 부부사이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을 정도로 정태적(靜態的)이다. 이 작품은 독자들로 하여금 장애인 남편을 속이고 경멸하는 아내가 언젠가는 복수당할 것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장은진씨는 남편의 복수심이 겉으로 표출되거나 행동화되는 것을 상투적이라고 파악하면서 그를 피하려고 한 것인지 모른다. 상투적인 애정소설이나 복수담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무화과 베어내기, 엽기적인 요리 만들기 등과 같은 의외의 행위를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긴밀도를 높여 준 또 하나의 힘은 정확하고 시적인 문장의 구사력에서 찾을 수 있다. 섬세한 내면탐구와 충격적 사건설정을 포개 놓을 줄 아는 능력을 보강하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 심사위원=박범신.오정희.조남현(대표집필:조남현)

◆ 예심위원=김형경.박수연.방현석.서영채. 신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