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후진타오식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권력을 잡는 것은 기회에 의지하지만,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은 지혜에 따른다"는 중국식 표현이 있다. 중국공산당 16기 4중전회에서 장쩌민이 군통수권을 이양하고 완전히 퇴진했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사에서 최초의 평화적 권력이양이 이룩됐고 중국 정치의 예측 가능성이 커졌다. 한마디로 정상정치(normal politics)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이다.

9월 1일 장쩌민이 '후진타오가 이 자리에 오를 능력이 충분히 검증됐다'는 편지를 쓰기 전까지 막후에서 노선과 권력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었다. 후진타오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요구하는 당내외 세력을 활용하는 한편 덩샤오핑이 군사위 주석 사임에서 보여준 높은 결단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우회적인 압력을 가했고, 장쩌민은 퇴진 이후 안정적인 정치세력 확보를 통한 막후정치의 기반을 열기 위해 부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원로들의 인치보다는 경제적 합리성과 엘리트의 합의에 기초한 새로운 중국 정치가 제도화되기 시작했고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시대적 화두를 읽으면서 세력을 확보해 나가는 후진타오식 정치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결과 혁명 원로 세대가 '백락이 천리마를 찾는 방식(伯樂相馬)'으로 찾았던 후진타오를 통한 제4세대의 정치실험의 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비록 단기적으로는 장쩌민의 술통에 후진타오의 술을 빚으면서 점차적으로 독자화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과 군부에 장쩌민 세력이 광범하게 포진해 있는 정치공간의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미국의 대선이나 대만 입법원 선거 등 불투명한 정치일정의 시간적 제약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 체제는 중단기적으로 준비된 새로운 정치를 드러내면서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을 선보일 가능성이 크다.

첫째, 정치개혁의 가능성이다.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제한적으로 정치개혁을 도입해왔으나, 지금은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통해 경제적 활력을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후진타오 체제 출범 이후 줄곧 당내 민주화를 강조하고 민주적 선거제도를 도입했고, 올해 3월에는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과 인권조항을 헌법에 삽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16기 4중전회에서 당의 집정능력을 강화하는 결의를 통과시키는 한편 민주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공산당의 혁신이 없이는 부국강병이라는 중국의 국가목표를 추구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국제문제에서는 보다 온건한 노선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는 대만 문제 등에서 장쩌민과 입장 차이를 단기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당내 강경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문제에서는 '평화적 부상' 전략을 구사하는 등 보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단기적으로 2008년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上海) 박람회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중.미 관계와 주변국가와의 선린우호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다극체제를 향해 유럽과 아세안 등으로 거점을 확대하는 긴 여정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 대내적으로 상대적으로 균형을 강조할 것이라는 점이다. 후진타오는 사스 퇴치 과정에서 독자적인 리더십을 형성했고 이 과정에서 기층 속에서 국민과 호흡하는 민본주의(以人爲本) 정치이념을 가다듬었다. 특히 후진타오는 공산주의 체계 내에서 충실하게 성장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당 노선의 제약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문제에서도 낭비적 국가지출을 줄이고 경기과열을 냉각하면서 균형점을 찾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도기 권력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독자권력을 공고화하면 장쩌민이 3개 대표론을 통해 자신의 입언(立言)을 관철했던 것처럼 후진타오도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천안문 사건의 재평가 등을 통해 대중과 국가의 인식의 괴리를 메워나가는 중국형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열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희옥 한신대 교수.중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