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오 수정' 27일 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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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프러덕션 회사의 PD인 영수(문성근)는 가정이 있는 몸이지만 같은 회사 구성 작가인 수정(이은주)와 가까운 사이다. 영수는 영화를 만드는 데 금전적인 도움을 받기위해 부유한 후배인 재훈(정보석)의 미술전시회에 수정과 함께 찾아간다.

그런데 재훈은 처음 본 수정에게 끌려 자주 만나게 되고 이윽고 진지하게 사귀고 싶다고 고백한다. 한심하고 무능력한 영수에게 실망한 수정은 재훈에게 술 마실때만 애인이 되겠다고 말한다.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진다.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은 한 여자와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그러나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기승전결적인 구조는 찾을 수가 없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필요로하는 최소한의 것만을 얻게 되는 과정을 마치 세밀한 정밀화처럼 묘사한다.

홍 감독의 전작 ‘강원도의 힘’에서처럼 관객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가 스크린에 투영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산다. 그리고 그 기억이 진실이라고 믿고 산다.하지만 기억이야말로 가장 왜곡되고 변질되기 쉬운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덧붙여지고 자기 식대로 해석된 기억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모두 5부로 나눠지는데 처음과 세째는 남자의 기억, 둘째와 네째는 여자의 기억이 재현된 것이며 마지막에 두 기억이 접점을 찾으면서 완결된다. 각각의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유기적으로 결합돼 이야기가 완성되며 그 과정을 통해 관객은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 숨겨진 기억의 진시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오 수정’은 흑백영화다.홍 감독은 “컬러는 보는 이에게 필요이상의 정보를 주기때문에 흑과 백으로 단순화한 화면은 관객들이 주위 사물이나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인물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 감정변화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불완전한 색에 미혹되지 않고 대상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물과 사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 구도,어색한 듯 하면서도 현실감 있는 대사와 몸짓 등 홍감독 특유의 기법은 영화에 유머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홍 감독은 ‘일상의 세밀한 결들을 곤충해부학자와 같은 시선으로 잡아낸다’는 평을 얻고 있다. ‘미세한 부분에서도 전체를 볼 수 있다’는 신과학의 프랙탈 이론처럼 그의 영화에는 확실히 현대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전체적이 상,세계관이 전제되지 않은 해부학이 ‘과학’으로 성립될 수 없듯이 일상의 묘사에만 집중하는 건 결국 한계를 갖게 마련이다.

그런 ‘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그가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전제되어야 할 큰 틀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작업하는 한 곧 한계에 부딪치지 않을까 싶다. 27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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