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총리 사퇴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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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일 오전 총리 관용차인 에쿠스 리무진을 타고 정부 중앙청사에 들어섰던 박태준(TJ)총리는 이임식이 끝난 이날 오후 긴급 대여한 차를 타고 청사를 떠났다.

현 정권 창출의 주역으로서 자민련 총재에 이어 총리로 승승장구했던 그가 '1백28일 단명 총리' 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TJ의 사퇴 결심은 파문이 시작된 지난 17일부터 감지됐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 이날 오후 2시 측근으로부터 부동산 명의신탁 등에 대한 법원 판결문을 보고받은 朴총리는 "이게 뭐요" 라고 되물은 뒤 "내가 할 일이 생겼구먼" 이라고 독백을 했다는 것. 사안의 심각함을 직감적으로 파악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잠시 뒤 朴총리는 "남북문제도 있고 (대통령을)도와드릴 일이 많은데…" 라며 서운하고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TJ의 핵심 측근은 "자존심이 센 그의 스타일로 볼 때 떠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감을 잡은 것 같다" 고 했다.

이 과정에서 TJ의 충격도 적잖았다. 朴총리는 17일 저녁 총리공관으로 돌아간 뒤 수행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 며 부인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평소 자신을 '디지털 총리' 로 여겨온 朴총리는 18일 오후 2시30분 테헤란로 벤처 밸리 행사에 참석하기 전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행사나 한번 가보자" 고 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朴총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부담을 안기고 떠나야 하는 데 대해 고심했다고 한다.

남북 정상회담 직전 돌발사태로 물러나게 돼 후속 개각 등 국정 수행에 적잖은 혼선을 초래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마침 金대통령이 광주 5.18행사에 참석해 양측의 조율도 원활하지 않았다.

총리실은 18일 오후 6시 대국민 사과문을 내며 마지막으로 여론 추이를 살폈으나 "어쩔 수 없다" 는 결론이 내려졌다.

18일 오후 9시50분 총리공관에서 대책회의 중이던 조영장(趙榮藏)총리비서실장과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간에 전화가 오갔다. 곧이어 오후 10시30분 TJ가 직접 韓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의사를 분명히 전했다.

金대통령과 TJ의 19일 오전 만남은 15분 만에 끝났고 곧 '총리사퇴' 가 발표됐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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