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수출길 막는 TV자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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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바이어들이 프로그램을 사기 전에 '자막이 많이 들어갔느냐' 고 꼭 물어봅니다. 지저분하고 어지러워 보이는데다 화면에 보이는 뻔한 상황을 굳이 자막으로 넣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합니다. "

한국 방송 프로그램 해외판매를 전담하고 있는 아리랑TV 영상물 수출 지원센터 김태정 차장은 16일 "국내프로는 빠짐없이 자막을 넣는 상황에서 바이어들마다 자막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고 한숨 쉬었다.

그는 "자막이 없는 '클린 버전' 이 있는 프로는 그것을 구해 팔지만 대부분은 그마저 없어 판매가 불가능하다" 고 덧붙였다.

매일 TV화면을 가득 메우는 자막공해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 우리 프로의 수출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50분짜리 오락프로에 보통 6백~7백회씩 자막이 나온다. 여기 등장하는 글자수는 무려 6천~7천자. TV의 볼륨을 최소화하고 보더라도 프로그램 내용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내용은 '애써 외면하는 철우' '현정의 OK를 받고 기뻐하는 민현' 등 화면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옮긴 것들. 자막홍수는 오락물은 물론 시사.교양물에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잘 들리는 전화인터뷰도 대부분 자막을 병기한다. "자막을 안쓰면 우선 내 본인이 허전하고 이상하다" 고 한 PD는 말한다.

우리 TV가 이렇게 자막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저렴한 비용으로 시청자를 붙잡아주는 수단이 된다고 믿기 때문.

"시청률 압박을 많이 받는 PD일수록 자막의존도가 높고 시청률 압박을 적게 받는 PD일수록 자막 의존도가 떨어진다" 는 한 현역PD의 석사논문 연구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삼행시처럼 공허한 내용이라도 일단은 자막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청자들로서는 말장난에 불과한 자막을 끊임없이 바라봐야하는 것이 지겹다.

무엇보다 자막 방송은 화면에 대한 시청자의 다양한 생각을 한 방향으로 단순화시킨다. 마치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여주는 듯한 친절한 해설 속에 시청자를 미성숙한 소아로 여기는 방송사의 권위적 시각이 담겨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아리랑TV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등 대부분의 방송 선진국에서는 자막을 쓰는 프로가 거의 없다. 오직 일본만 자막방송으로 유명한데 일본이 방송 프로를 해외에 수출해 재미를 본 케이스는 찾기 힘들다" 고 말했다.

강찬호 대중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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