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세상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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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고 만난 파리, 김윤식 지음
현대문학, 204쪽, 9000원

나는 ‘작가’김윤식을 좋아한다. 십여 년 전 그의 기행산문집 『환각을 찾아서』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기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무렵 읽은 어떤 작가의 작품도 내게 그렇게 강렬하고 스산한 떨림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 그의 기행산문집은 다 찾아 읽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집어 든 게 그저 우연은 아닌 것이다.

‘파리’라고 했지만 그건 실은 샹그리라라 해도 좋고 프라하라 해도 어쩌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파리는 그에게 “지구상의 한 도달해야 할 점이자 떠나야 할 점”이며, 저자는 최소한 두 해마다 파리에 간다고 했다. “노트르담이 지척에 보이는 호텔에 머물며 (…) 바라보는 것은 노트르담을 보는 것도, 그렇다고 모리를 보는 것도 아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음미하기 위함”이다.

파리를 향한 이 노학자의 여정은 1980년 도쿄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서관 서고 속에서 낮 시간을 송두리째 보내고 밤이면 도쿄 타워의 불빛이 마주 보이는 바닷가 독신자 아파트에서 잠을 청하곤 했을 때, 낙타도 없이 혼자 사막을 걷고 있는 심사였을 때” 『바빌론 흐름의 기슭에서』라는 책을 통해 모리 아리사마를 만난다. “하나의 생애라는 것은 그 과정을 영위함에 있어 생명의 어린 날에 이미 그 본질에 있어 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재를 반성하고 유년기를 회고할 때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은 비통함과 동시에 한없는 위안을 안겨준다. 그대는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시작하는 책이다. 생을 뒤흔드는 운명적 만남이 대개 그렇듯 그것은 우연이었고 이어 그는 모리의 책을 섭렵해 가면서 당시 도쿄대 조교수였던 모리가 일본을 떠나 가족까지 버리고 정착한 도시 파리를 향해 몸을 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묻는다. 모리는 왜 파리로 갔는지, 가서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는 스스로 대답한다.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는 그 외로움에 정면으로 운명처럼 부딪쳐 이를 회피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파리도 노트르담도 책 속에 있는 허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 허상 속에 현실의 본질이 들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예술이 형이상학적인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요컨대 미(美) 란 완벽성으로 부족하다. 슬픔이 그 속에 아직 있어야”하며 “깨달음 그 자체란 물론 완성을 가리킴인 것,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딱딱한 진리이며 삭막한 세계다. 그 위에 그리움(悲) 이 있고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깨우침이 아닐 것인가. 헤겔 미학 강의에는 없는 이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을의 파리, 그가 별로 나를 신경쓰지도 않고 휘저휘적 걸어가는 그 파리를 그를 따라 한없이 걸어다닌 기분이 들었다. “축복처럼 내리는” 뼈저린 고독이 문장마다 숨어 있는데 결국 내 짐작대로, 그가 이르른 곳은 “농가의 장남, 비가 그치면 돌밭으로 된 빈 강변의 버드나무 숲에서 벗할 수 있는 것은 까마귀나 민들레나 패랭이꽃(…) 십리길 걸어서야 있는 읍내 소학교에 다니는 누나의 교과서만이 오직 열린 낯선 세계”였던 촌스러운 소년이다. “까마귀, 붕어와 여치, 그리고 패랭이꽃을 속이고 나는 살아왔다”라고 고백하고야마는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책을 덮은 뒤에도 한참을 들려오는 듯했다. 거의 100권에 이르는 저서를 가지고 있고 평단과 강단의 거의 모든 젊은이를 제자로 두고 있는, 읽고 쓰는 것 외에는 술도 담배도 노름도 도박도 계집도 모른다고 소문난 이 노학자는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서 말하고 있다.

“내가 즐긴 노트르담은 따로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아침의 노트르담, 햇빛 속의 그 장중한 건물이었다. 건물과 햇빛을 빼면 아침의 고요함만이 내가 즐긴 것이었다. 여인의 발자국 소리, 그 여운을 옆에 둔 노트르담.” 아아, 다시 가을이다.

공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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