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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수컷들의 시선 끌기…광적인 아름다움 추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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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했던 1987년 나는 어떤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폭파 사건이 있은 며칠 후 오전 수사 결과가 공식 발표된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폭파범 여성이 등장했을 때, 그녀의 고개 숙인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되었을 때, 함께 있던 동료들의 입에서 각종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녀가 “예쁘다!”는 것이었다. 그때 텔레비전 앞에 서 있던 동료 중 90%는 남성이었고, “예쁘다”는 유의 말은 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내내 들려왔고, 그들을 사로잡은 가장 중요한 ‘사실’인 듯 보였다.

나는 속으로, 혼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예쁘다는 사실 앞에서 그녀가 저지른 범죄, 그 배후에 있는 어떤 집단의 무모함, 그녀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또 다른 집단의 저의 등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그런 인상은 그 후로도 그녀가 국민들의 동정표를 얻으며 수사 기관에 의해 관대하게 다뤄지는 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책을 내고 비공식적으로 면죄부를 받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혼돈스러웠다. 비행기 폭파범이 늙고 못생긴 여자거나, 힘있는 남성이었어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을까. 그것은 같은 성적 소수자의 처지인데도 하리수의 연예 활동은 활발하게 이뤄지는 반면 홍석천은 그렇지 못한 것에서 느끼는 의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의문을 풀려면 우리가 남성중심의 문화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스몬드 모리스가 이번에 새로 낸 책 『벌거벗은 여자』는 그런 혼돈스러움에 대한 기초적인 답을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을 성적 동물이라는 코드로 읽은 『털없는 원숭이』의 시각과, 인간의 몸을 해부학적으로 탐구한 『바디 워칭』의 방법을 여성의 몸에 국한시켜 집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감히 여성의 몸에 대한 동서양의 생물학적·진화심리학적·인류학적 정보의 집대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자료적 측면에서 다양하고 풍성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주제로 책을 쓴다 해도 이것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한 분야의 학문적 세계를 고수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심화, 확장시켜온 저자의 노력에 존경의 마음도 품게 된다.

그런데 왜 『벌거벗은 여자』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을까. 우선 제목부터 그렇다. 『맨 워칭』과 짝을 이루는 책이면 왜 ‘우먼 워칭’이 아니고 ‘벌거벗은 여자’인가 말이다. 그 제목에는 여성을 관음과 향유의 대상으로 보는 데 길들여진 남성의 시선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자의식은 책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욱 예민하게 발동된다. 여성의 몸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커다란 엉덩이, 건강하게 상기된 피부, 풍만한 가슴이 미덕이라는 기본적인 진술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성은 여성의 몸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여겨 왔으며,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여성의 몸을 억압해왔다는 내용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여성의 생물적 자연스러움을 왜곡하고 통제했다. 허리를 가늘게 하는 코르셋, 발을 작게 하는 전족 풍습, 귓불이 어깨까지 늘어지도록 하는 귀고리, 목을 길게 빼도록 하는 청동고리, 아랫입술에 매단 접시 만한 장식 등. 더구나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시행되고 있는 소녀들에 대한 성기 절제 풍습을 접할 때면 고통스럽다. 이 책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과 왜곡의 인류학적 고찰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이르러 여성의 몸은 자유로워졌는가? 여성의 몸에 대한 전근대적인 억압과 왜곡이 사라졌는가? 그 질문에 대해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의 『몸 숭배와 광기』라는 책이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게 진행되어온 여성의 아름다움 추구가 현대에 이르러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여성은 이제 미적 이데올로기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자발적인 추구자가 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이 완벽한 몸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구명대와 같아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고 모순적인 시기에 그것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지팡이에 의지하면 여성의 삶과 역할이 한층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문신·성형수술·피어싱 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이 생물적 자연스러움을 비틀고 재구성하는 방식인 것도 예전과 다름없다. 아니, 예전보다 더 심한 광기의 행태를 보인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인위적인 조작은 거의 파괴의 수준이다. 많은 성형 수술의 실상은 마치 자발적인 고문처럼 보인다. 성형 기술이 발달할수록 여성들이 받아들이는 폭력의 수위는 높아진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기 위한 의무적인 단계로서 여성들의 자신들의 몸에 불만을 품는다.”

여성의 몸이 성적 매혹, 관능적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광기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면 남성의 몸은 물리적인 힘을 추구하며 폭력성을 갖추도록 진화해왔다(리처드 랭햄의 『악마 같은 남성』). 남성이 그토록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는 여성이 사유 재산의 일종이라는 단순한 경제 논리에 있지만은 않다. 남성의 성적 나약함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여성을 무력화해야만 힘의 사용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기시다 슈의 『성은 환상이다』). 무엇보다도 남성의 육체는 여성에 비해 구조적으로 불완전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엘리자베트 바뎅테의 『XY·남성의 본질에 대하여』). 그러니 힘을 숭배하는 남성들의 욕망에는 더 많은 여성을 차지하기 위한 욕망뿐 아니라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식하는 자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폭력적으로 진화해온 원인의 반이 여성의 책임이듯이,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광기의 원인도 절반은 남성의 몫이다. 남성은 여전히 여성의 아름다움에 매혹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고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폭력성 앞에 잠재된 공포증을 느낀다.
아마도 현대 문명은 폭력성과 관능성이라는 두 줄기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는 듯 보인다. 뒤늦게 음모설이 등장하고 있는 KAL기 폭파 사건에서도 또 하나의 사회심리학적 음모를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폭파범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늙고 힘없는 노인의 조합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이 사회의 지배 세력인 남성 집단을 가장 덜 자극하는 존재들이며, 그리하여 가장 빠르게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원고를 시작하면서부터 끝낼 때까지, 이런 책을 소개하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자의식이 있다. 이를테면,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남자』를 보면서 여성들은 그야말로 남자를 새롭게 발견한 듯 감탄하고 신기해했던 데 비해 대부분의 남성들이 “다 아는 얘길 가지고…”라고 심드렁해했던 것처럼 『벌거벗은 여자』에 대해서도 그런 것 같다. 많은 여성들은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며 “다 아는 얘길 가지고 새삼스럽게…”라고 생각할 확률이 크다. 그렇지만 남성들은 틀림없이 “굉장한 책이다!”라고 열광할 것 같다.

오히려 내게 더 관심이 있는 대목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양측 사이의 간극이다. ‘몸’은 21세기 인문학의 중심 화두가 될 것이라 한다. 인간의 몸을 생물학적·미학적·의학적으로 읽는 데서 벗어나 몸의 정치성·경제성·문화성을 읽어내는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심화 확장되고 있다. 그런 논의가 남녀 사이의 틈을 좁히는 기능을 할 수 있을까, 또 혼자 생각해본다.

김형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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