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밀사 평양밀사] 1. 72년 정홍진씨 첫 북 잠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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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는 6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냉전의 빙벽을 녹일 화해의 빛이 한반도에 쏟아지길 우리 모두 기대하고 있다.

회담을 한달여 앞둔 시점에서 김대중(金大中)정부 이전에도 민족 화해와 평화 공존의 물꼬를 트기 위한 노력이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거물급 밀사들이 휴전선을 넘나들었고 이면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두 정상이 한 자리에서 무릎을 맞대기까지 30여년간 '샅바' 를 움켜쥐고 지루한 힘겨루기를 한 셈이다.

과거에서 지혜를 찾는다는 취지로 남북간의 숨가빴던 순간을 되짚어보는 비사(秘史)를 연재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향한 밀사들의 잠행은 살벌하게 시작됐다.

1972년 5월 2일 아침 청와대 집무실.

"임자, 갈 결심은 다 돼 있지" 라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마지막 다짐에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힘주어 대답했다.

"청산가리를 가지고 갑니다."

사전 협의에 따른 북행길인데도 극약을 휴대할 정도로 당시 남북관계는 얼어붙어 있었다.

朴대통령의 얼굴도 몹시 굳어 있었다.

곁에 있던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와 최규하(崔圭夏)외교담당특별보좌관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朴대통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李부장, 우리가 북한에 비해 절대 우위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대화에 임하게. 적화통일을 할 수 있다는 김일성(金日成)의 환상을 꺾어 놔야 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하게. "

당시 朴대통령은 북한과의 국력 경쟁에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신념에 불타 있었다.

그런 그가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기로 결심을 굳힌 것은 닉슨 독트린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가 갑작스럽게 완화국면에 접어든데다 경제개발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선 일단 시간을 벌어놓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도 실은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청와대를 빠져 나온 이후락은 곧바로 판문각으로 향했다.

정홍진(鄭洪鎭)중정 협의조정국장.수행원.의사 등 3명이 그를 수행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를 넘는 순간, 일행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로부터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는 30여년 인고의 세월이 필요했다. 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된 지난 4월 10일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朴전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집권자들은 남북관계의 실마리를 푸는 역사적 인물이 되길 갈구했지만 환경과 여건의 미비로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박정희-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김영삼(金泳三)으로 이어지는 지도자들은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중심축으로 하고 민족문제 해결을 또다른 정책의 축으로 삼아 누구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밀사들이 서울과 평양을 비밀리에 오가며 정상의 상봉을 심도있게 논의했으나 그 어느 정권도 종착역에 이르지 못했다.

남측 밀사는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로 바뀌었지만 북측에선 대남사업의 본산인 노동당 3호청사 실무 책임자들이 접촉 포인트에서 활동했다. 대북 밀사들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마음 졸이며 회담을 추진했고, 북측은 접촉과정에서 간혹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을 보여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밀사의 첫 북행길은 72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적십자 예비회담의 막후 접촉에서 길을 트게 된다.

이후락과 김영주(金英柱)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간의 고위급 회담이 鄭국장과 김덕현(金德賢)당 중앙위 책임지도원간의 밀고당기기 4개월 만에 매듭지어졌던 것이다.

金주석의 친동생 김영주는 당시 북한의 2인자, 6촌 동생 김덕현의 실제 직급은 중앙당 부부장이었다.

3월 28일 혼자 평양을 방문한 鄭국장은 3박4일간 머무르며 김영주와 두차례 만났다. 김영주는 鄭국장을 한껏 치켜세우며 뜻밖의 발언을 했다.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鄭국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31일 오후 鄭국장은 서울 도착 즉시 李부장과 함께 청와대로 달려갔다. 방북 보고 자리에서 그는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하, 북쪽이 매우 적극적입니다. 김영주가 李부장과 평양 또는 원산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음 달에 김영주의 친서를 가진 사람이 서울에 올 것입니다. "

그러나 朴대통령은 의외로 신중했다.

"鄭국장, 공산당을 너무 얕잡아 봐선 안돼. 공산당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신중하게 추진하게. " 金주석을 평생의 경쟁상대로 생각했던 그였기에 북측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경고였다.

그로부터 19일 후 김덕현이 김영주의 친서를 가지고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3일간 체류했다.

밀사들의 왕래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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