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선동장 될라” 9·11 민간재판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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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9·11 테러리스트를 군사법정으로 보내라.”

5일(현지시간) 오후 2시 미국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 앞에선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때마침 뚝 떨어진 수은주에다 쏟아지는 진눈깨비에도 불구하고 시위대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시위대의 표적은 9·11 테러 용의자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등 5명이었다. 시위대는 ‘USA, USA’라는 구호와 함께 미국 국기를 흔들었다.

이날 시위는 최근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테러 용의자들을 뉴욕으로 이감해 정식 재판을 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9·11 테러 희생자 유족과 보수진영이 주도한 집회였다. 뉴욕 연방법원은 9·11 테러로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다.

시위대는 “테러리스트는 미국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 없다”며 “이들을 군사법정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보수진영은 모하메드를 비롯한 9·11 용의자들이 재판 과정에서 테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알카에다를 선전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시위대 중 한 명은 “미국은 테러리스트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메가폰을 쥐여 주려고 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공화당 일각에서도 이런 이유로 이들의 재판을 반대하고 있다. 공화당 트렌트 프랭크 하원의원은 “테러리스트가 이 연방법원 재판을 자신들의 선동을 위한 무대로 악용할 수 있으며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대한 악선전의 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용의자들이 무죄를 주장하며 자신들을 변호하기 시작하면 재판은 상당히 길어질 수도 있다.

다른 일각에선 이번 재판을 통해 관타나모 수용소의 실태가 밝혀지는 걸 우려한다. 모하메드 등 9·11 테러 용의자들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도 1급 전범으로 분류됐다. 이로 인해 수사 과정에서 갖가지 고문이나 강압행위가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크다. 그는 물고문 등 183차례의 가혹한 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관타나모 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하면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실제로 모하메드 등 테러 용의자들은 이번 재판을 앞두고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부시 정부의 대이슬람 정책의 부당성을 집중 부각한다는 전략이다. 이럴 경우 미국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관타나모 수용소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은 오바마 정부가 테러리스트 재판을 굳이 뉴욕으로 옮겨온 배경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다. 테러보다는 관타나모 고문 실태를 부각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테러리스트라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게 미국의 가치”라며 “9·11 용의자에 대한 재판도 정당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테러리스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대중 앞에서 밝히는 게 오히려 테러의 정당성을 약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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