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주말향기] 형님의 복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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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은 좀 괜찮으냐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고 얼른 말했다. 형은 계속 걱정을 한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얼른 끊어버렸다. 사실 나는 바쁘지 않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내가 답답해서였다. 동생의 사업 실패가 형에게는 너무 안쓰럽고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사흘이 멀다 전화하는 형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려올 것 같기에 냉정하게 보여야만 했다.

형은 내 바로 위라 친구처럼 지낸다. 편하고 또 좋고 해서 집안일이 있을 때면 나는 형에게 모든 걸 맡기는 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나를 다 받아주는 형이 고맙고 미안하기까지 하다.

그런 형에게도 말 못할 추억이 있다. 어릴 적 형은 유독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사고란 사고는 도맡아 쳤다. 어머니 몰래 돈을 훔친 일, 암자에 들어가 친구들과 불상을 깨뜨린 일, 동네 가게에 외상 단 일, 중학교 졸업 무렵 친구들과 가출한 일 등 꼽기 힘들 정도다.

그럴 때마다 형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곤 했다. 나는 그런 사실들을 알았지만 함부로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형의 압박 같은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형이 술 한 잔 먹다가도 전화로 나를 위로한다. 그러면서 "제수씨가 걱정이 많겠구나"하고 내 집사람의 안부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가족에게 미안해 가슴이 저민다. 그런 이유로도 나는 전화를 빨리 끊으려 애쓴다.

올 여름 태풍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다시 나의 안부를 묻는다.

생활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하자 형은 대뜸 일주일만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일주일 후 형은 어김없이 전화해 다시 일주일만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일인데?"라고 거듭 묻자 간밤에 좋은 꿈을 꿔 복권을 샀는데 낙첨됐다며 다시 일주일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한동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난 뒤 소리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형은 저토록 동생에게 용기를 주고 싶을까? 그렇게서라도 동생에게 희망을 주고 싶을까'. 첫 잔엔 웃지만 두번째 잔에 슬피 울고 있을 형이 문득 그리워졌다.

형! 나는 언제고 일주일을 기다릴 수 있어. 형이 기다리라면 못 기다릴 이유가 없잖아. 날 걱정하는 형이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다. 지금 내 형편이 어렵지만 날 걱정해 주는 형을 생각하니 의욕이 생긴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 좋다. 일주일 더 기다리자. 왜 못하겠어."

박인주(38.서울 관악구 봉천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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