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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과거 '핵 활동' 전면 공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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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반도가 핵 문제로 열병을 앓고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4차 6자회담 준비에 바빠야 할 이때에 엉뚱하게도 '남핵 문제'가 제기돼 한국이 국제사회와 북한의 지탄을 받는 형국이 돼 버렸다. 우리 정부는 연일 해명하고 있지만 매일 새로이 불거지는 의혹에 대한 사후약방문식 대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해명과 대응책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번 기회에 원자력 정책과 비핵화 정책을 재점검할 것을 제기한다. 원자력 정책과 현실 간 괴리를 시정하고, 비핵화 정책을 강화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비한 몇 가지 고려사항과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농축과 재처리 활동을 일부 과학자의 일탈행위 또는 절차상 하자로 간주하기에는 사태가 엄중하다. 농축과 재처리 연구실험 자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안전조치협정의 위반은 아니나 사전.사후 신고 미비는 위반에 해당된다. 특히 추출되고 생성된 핵물질의 누락과 미신고는 중대한 의무 불이행 사항이 될 수 있다. 양과 빈도가 극히 한정적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으며, 핵 비확산 체제를 훼손하는 행위로 비난받게 된다. 특히 한국은 1970년대 후반 핵개발을 시도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한국의 핵 활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구심은 뿌리 깊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둘째, 북핵 문제와 '남핵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북핵 문제는 핵무기 개발 문제이나 '남핵 문제'는 원자력 연구활동의 문제다. 북한은 공공연히 핵무장을 주장하는 핵개발 '현행범'이지만 국제사회로부터 열외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저 핵 동결이나 유지하면 고마워할 판이다. 그러나 한국은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엄격한 비확산 기준을 적용받고 있다. 조그마한 일탈행위도 용납되지 않으며, 이것은 한국의 신용과 신뢰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 과거 핵 활동을 전면 공개해야 한다. 사실 별일도 없으면서 국제사회의 오해와 억측을 자아낼 필요가 없다. 혹시 오해 살 여지가 있었다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진실을 고백하고 IAEA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이해를 요청해야 한다. 적지 않은 핵 고백의 전례가 있다. 이들은 과거 군사정권 아래서 핵개발을 추진했으나 문민정권 등장 이후 핵 포기를 공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인정받았다. 한국이 올 초에 비준한 IAEA 추가의정서에 따르면 불시 사찰과 환경 샘플링을 허용함으로써 모든 핵 활동이 노출되기 때문에 전면 공개는 불가피하다.

둘째, 평화적 원자력 연구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 한국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에서 유례없이 농축시설과 재처리시설을 포기했다. 그런데 시설 보유 금지를 연구실험의 포기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한.미 원자력협력협정(1972)은 한국의 원자력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최대 기여자인 동시에 구속자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이 협정은 핵 물질의 변형에 대한 미국의 '사전동의권'을 수용해 핵연료 연구를 위한 실험마저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6대 원자력 발전국에 대한 지나친 규제로서 오히려 과학자들의 반감과 일탈행위를 조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셋째, 유사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원자력 외교와 핵 통제체제를 재정비해야 한다. 핵 문제의 과학기술적.외교적 성격을 감안해 외교통상부와 과학기술부는 협의 체제를 유지하고 원자력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과기부는 원자력과 핵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해 원자력 정책 담당부서의 권한과 책임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내 핵사찰 담당기관인 '핵 통제기술센터'의 독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비핵화 정책 의지를 반복해 천명하고, 대국민 비핵화 교육을 해야 한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류의 사이비 민족주의적 핵 인식이 통용되는 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원자력 정책이 설 땅이 없기 때문이다. 원자력 과학기술과 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협조가 불가결하다. 이를 위해 사찰을 통한 물리적 핵 투명성 못지않게 정치지도자와 국민의 강력한 비핵화 의지 등 정치적 핵 투명성도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봉근 평화협력원 원장 전 청와대 국제안보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