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슬픈 남반부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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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 한반도 남반부는 갈수록 이상한 경기에 휩쓸려들고 있는 듯하다. 심판도 없고 관중도 없고 그저 갈라선 두 팀과 그들의 이상한 코칭스태프만 있다. 거기다가 경기규정은 애매하고 가끔은 종목조차 무시되지만, 맞서는 두 편의 투지만은 유례없이 뜨겁다.

저마다 "선수하겠다" 경기장 난입

심판이 없어진 것은 근년 우리 경기장을 오염시킨 질 낮은 네거티브 문화 때문이라 한다. 존중해야 할 권위나 보장되어야 할 전문성은 오래 전에 지워졌고, 경청할 만한 교훈이나 준수해야 할 판정도 없어졌다. 교훈이나 판정이 내게 유리하면 우리 편이고, 상대편에 유리하면 적일 뿐이다. 충고나 조정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해에 따라 우리 편과 적이 있을 뿐이다.

관중이 없어진 까닭은 흔히 두 가지로 본다. 그 하나는 어설픈 평등이론에 홀린 관중 자신들의 반칙이다. 선수만 뛰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나도 선수 하겠다고 저마다 사제 유니폼 만들어 입고 경기장에 난입한 탓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이상하다 못해 고약한 양쪽 감독과 코치에게서 찾는다.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을 말리기는커녕 제 편으로 모셔가기에 급급하고, 때로는 스탠드의 관중까지 선동하여 편을 갈라놓고 있다고 한다.

경기규정이 애매해진 까닭은 집행부의 교체 때문일 것이다. 명문화된 규칙은 아직 그대로지만 해석을 다르게 해버리니 뜻이 애매해지고,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종목이 무시되는 것도 집행부 교체와 무관하지 않다. 선거에 근소하게 이긴 걸 무슨 대단한 혁명에 성공한 것쯤으로 착각하는 집행부가 다시 개혁과 혁명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란 풀이다.

하지만 그 어떤 현상보다 걱정스러운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을 뿜는 쌍방의 투지다. 우리가 언제나 일치하고 조화로웠던 것은 아니나, 근래 몇 년 쌍방이 거침없이 드러낸 적개심과 부정의 의지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를 연상시킬 만큼 섬뜩한 데가 있었다. 실제 겪어보지 못했는데도, 내전심리가 어떤 것인지 짐작될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빠져 있는 그 이상한 경기를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는 게 보안법을 둘러싼 여야의 힘겨루기가 아닌가 한다. 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논의의 본질은 인권과 안보의 충돌이었다. 재야 시절 그 때문에 인권을 침해당한 경험이 있는 여당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보안법 폐지를 들고 나오자, 야당은 그래도 아직은 유효한 안보 논리로 맞섰다.

하지만 야당은 곧 독소조항 폐지를 골자로 하는 개정 논의로 물러나 인권수호의 대의를 인정했다. 몇몇 의원을 빼고는 폐지를 당론으로 삼았던 여당도 대통령의 발언을 전기 삼아 안보의 대의를 인정했다. 형법을 개정하여 부실한 안보를 보완하겠다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본질적으로 보안법 논의는 여야의 일치를 본 셈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일치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형법을 고쳐 부실한 안보를 강화하고 보안법을 폐지해 인권침해의 소지를 없앨 것인가, 보안법은 그대로 두고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독소조항만 삭제 또는 개정할 것이냐의 차이만 남았다.

그런데도 국회 표결을 앞둔 양쪽은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 패자필사(敗者必死)의 승부를 앞둔 것과 같은 각오와 결의로 맞서고 있다. 그리고 각기 설득 아닌 선동을 해대니 국민도 덩달아 두 패로 나뉘었다. 자칫하면 정신적 내전에 들어갈까 겁난다.

이와 같은 난판이라 심판이나 조정이 끼어들 틈은 전혀 없어 보인다. 대법원의 판결도 어느 한편에 대한 편들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고, 추기경의 고언도 '우군의 지원'이거나 '보수골통의 망발' 쯤으로만 여겨진다. 결론을 달리하는 재야 원로의 권유나 조정도 또한 마찬가지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양쪽 모두 이기는 수 찾아야

하지만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하나 제안을 하자. 여당은 먼저 형법의 어떤 조항을 어떻게 개정하여 보안법 없이 안보의 공백을 메울지를 제시하라. 인권을 확보했으면 안보의 우려도 해소해주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고 야당은 여당의 형법 개정안이 우리 안보를 담보할 수만 있다면 보안법 폐지에 선선히 동의해주라. 법의 이름이야 어떠하건 안보란 실질만 확보하면 되지 않는가.

다른 경기와는 달리 이 정치란 종목에서는 양쪽 모두 이기는 수도 있다.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