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출판사 애퍼처서 사진집 『윈드(wind)』낸 이정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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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애퍼처가 출판한 이정진 작가의 사진집 『윈드(wind)』 표지.

지평선이 하늘과 땅을 딱 반으로 자른 광야. 그 한복판에 스쿨버스 한 대가 우두커니 서있다. 휑한 창틀과 녹슨 지붕만이 세월의 두께를 가늠하게 한다. 버스는 왜 거기 서 있을까. 문득 버스를 쓸고 지나간 황야의 건조한 바람이 느껴진다.

사진작가 이정진(48·사진)씨가 세계적인 사진 전문 출판사인 뉴욕 ‘애퍼처(aperture)’에서 사진집 『윈드(wind)』를 냈다.

이 책에 실린 스쿨버스 사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 9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애퍼처에서 사진집을 출판한 한국 작가는 김아타씨 이어 이씨가 두 번째다.

윈드에는 이씨가 89~90년 뉴욕대(NYU) 대학원 시절 뉴멕시코주 사막을 헤매며 찍은 사진을 주로 담았다. 우리에겐 이국적인 풍경이지만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파노라마 카메라로만 찍은 그의 사진집엔 유난히 여백이 많다. 굳이 채우려 하지 않고 비워둔 공간이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인화지 대신 한지를 사용한 프린트 기법도 이 같은 효과를 증폭했다. 전주의 장인이 만든 한지에 감광액을 손수 입혀 그 위에 직접 프린트한다. 감광액을 칠하는 붓질에 따라 사진의 느낌도 조금씩 달라진다. 이 때문에 하나하나가 마치 그림처럼 세상에서 유일한 작품이 된다.

그는 “판화지·신문지·냅킨까지 써봤지만 한지가 제격이었다”며 “고르지 못한 테두리도 회화적인 이미지를 잘 표현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은 노출과 앵글을 자로 잰 듯 맞춘 사진과도 거리가 있다. “낯선 이방인이 현장에서 얻는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대사진의 대가이자 그의 스승인 로버트 프랭크에게서 배운 대로다. 맑은 날도, 해 질 녘 황금 시간도 기다리지 않는다. 사진집 말미엔 경북 시골마을의 폐교 사진도 보인다. 드문드문 깨져 나간 창문 너머로 쓸쓸하게 서 있는 이순신 동상이 태평양 건너 산타페 황야의 스쿨버스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사진은 내면의 나를 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공간의 정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씨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89년 작업한 ‘무제’는 현재 ‘표면의 긴장(Surface tension)’이라는 주제로 메트 소장품을 모은 사진전에 전시되고 있다. 1년 동안 맨해튼 거리를 누빈 그의 신발 밑창을 찍은 작품이다.

그는 내년 1월 서울에서 윈드 출판기념회를 연 뒤 3월엔 맨해튼 첼시의 애퍼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내친김에 다음 프로젝트도 뉴욕에서 진행할 생각이다. “사물·바람을 거쳐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그는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순수한 인간 본성을 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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