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나는 왜 무응답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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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늘부터 4.13 선거날의 투표마감시각까지 선거여론조사는 고개를 숙이게 됐다. 그러나 조사결과 공표나 인용보도만 금지될 뿐 여론조사 자체는 물밑에서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이 와중에 각 가정이 당하는 전화공세는 '공해' 수준이다. 조사원과의 대화는 옛말이고, 신호가 울리면 자동응답시스템으로 'A당 X후보 지지하면 1번, B당 Y후보 지지하면 2번…' 식으로 그냥 눌러만 달란다.

시킨대로 따라하기보다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선거여론조사에서 무응답자가 30~40%, 심지어 절반이 넘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여론조사가 생활화된 미국에서도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응답을 거절하는 비율은 줄잡아 60~70%다. 두세번씩 시도해 답을 받아내는 끈기와 노하우가 여론조사의 생명이다.

전화공세에 진저리가 난 미국의 한 작가가 언젠가 '나는 왜 무응답자인가' 라는 제목아래 무응답자의 변(辯)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적이 있다.

응답거부는 우선, 애국심이나 협조정신과는 무관하다. 무응답자들 대다수는 꼬박꼬박 투표를 한다. 그럼에도 왜 응답을 거부할까.

그 첫째가 시간을 빼앗기고, 하던 일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저런 조사기관이라고 밝히며 물어오는데 실제 저쪽이 누구인지 알 재간이 없다. 상대방은 최소한 내 전화번호라도 알고있지 않은가.

셋째, 어떤 질문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불필요하게 노출시킬 위험이 있다. 일단 조사에 응하면 중도에 답변을 그만두기가 어려워 내키지 않는 말도 하게 된다.

넷째, 조사자들이 응답자에게 영향을 미치려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후보에 '이런저런 비리가 있는데 아십니까' 하는 유의 흑색선전이다.

여론조사에 협조함은 구걸자에게 푼돈을 쥐어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 적선(積善)이지만 질문 또는 구걸하는 쪽의 정직성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우리 무응답자들의 경우 자신의 견해를 남에게 잘 밝히려 들지 않는 사회적 태도에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피해의식의 잔재 또한 무시 못한다.

하물며 사이비 조사기관들이 난립하고, 심야에 상대후보의 이름을 사칭하며 유권자에게 불쾌감을 유도하는 '전화스토킹' 까지 횡행하는 상황에서랴. 여론조사는 여론흐름을 추적함과 동시에 여론을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여론조사결과 보도는 적을수록 좋다' 는 말도 이 때문이다. 무응답이 절반에 가까운 여론조사에 얼마나 대표성이 있을까.

전화여론조사기법을 보급시킨 미국의 사회통계학자 워런 미토프스키는 응답거부자에게 몇번씩 전화해 답을 받아내야 제대로 된 조사가 된다며 당일치기나 간밤의 조사가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답변을 받아내기 쉬운 사람들로 인원수를 채우면 그 표본은 작위(作爲)가 된다. 오차범위와 신뢰구간도 표본이 무작위일 때만이 의미가 있다.

책임있는 여론조사일수록 결과공표 때 설문내용과 응답자 선정방식도 함께 밝힌다. 유효응답수가 얼마이고 '응답을 거부한 사람' 과 '의견없음' 도 구분함이 원칙이다.

이미 우리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20~30대다. 조사대상이 안정된 중산가정 위주이고 젊은층과 빈곤층이 소외돼 표본의 대표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대학교수들과 연구단체들이 '윤리강령' 까지 제정하며 감시에 나섰을까. 더욱 위험한 것은 이런 도토리 키재기식 지지율 비교를 전국단위로 취합해 판세를 일반화하는 경향이다.

흥미를 끌지는 모르나 특정후보들을 결과적으로 유리하게 만들고 투표성향의 고착화를 유도할 위험 또한 크다. '특정정당 특정지역에서 90% 이상 우세' 는 '저쪽이 그러니 우리도' 하는 식의 지역대결을 더욱 부추긴다.

물론 무응답자 가운데 찍을 후보를 결정 못한 경우도 있고 맘에 차는 후보가 없어 아예 선거에 무관심한 부류도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무응답사태' 로 미뤄 '나는 왜 무응답자인가' 하고 외치고 싶은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높은 무응답률이 곧 흥미위주의 경쟁적 여론조사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과 경고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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