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데이트] 아시아축구연맹 감독상 허정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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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아니라 아직 만족하지 말라는 채찍입니다.”

2009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감독상 트로피를 바라보며 허정무(56) 감독이 말했다.

한국 축구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위업을 달성한 허 감독은 2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AFC 시상식에서 ‘올해의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올해 아시아 축구 지도자 중에서 받는 최고 상이다.

그는 “해가 비칠 때 비 올 때를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며 “본선까지는 산도 넘고, 강도 건너야 하는 등 고비가 많다. 상을 채찍 삼아 목적지까지 순항하겠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시상식에 참석하고 막 귀국한 허 감독을 25일 서울 반포동 그의 집에서 만났다. 마침 그의 집에는 축하 화환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패배 알고 나니 승리가 따라왔다”=허 감독은 국가대표 시절이던 1978년 메르데카컵 대회 이라크전 때 고환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결승전에 출전해 2-0 승리를 이끌었다. 그래서 ‘악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강한 승부욕은 선수로서는 강점이었지만, 지도자로서는 독이 될 때도 있었다. 10년 전 대표팀을 이끌 때만 해도 그는 스스로 패배를 견디지 못했다.

허정무 팀은 올해 마지막 A매치였던 지난 18일 세르비아와 평가전 때 0-1로 패하며 27경기 무패 행진(14승13무)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시아신기록(28경기 무패) 욕심도 있을 법했지만 허 감독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며 담담했다. 그는 “많은 패배를 경험하면서 지기 싫다고 몸부림친다고 승리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며 “복싱에서 카운터펀치를 날릴 때 힘을 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요람 골뒤풀이 때 전율했다”=한때 ‘허무 축구’로 불리며 흔들리던 위기를 벗어난 비결을 묻자 자신이 A매치에 데뷔시킨 박지성(28·맨유)과 기성용(20·서울)을 거론했다. 그는 “2000년 박지성을 A매치에 데뷔시킬 때는 ‘힘들어도 투지를 불태워라’ 등등 잔소리가 많았다”며 “가뜩이나 부담이 많은 선수들에게 내가 많이 미숙했었다”고 털어놨다. 허 감독은 지난해 9월 요르단전에서 A매치에 처음 나선 기성용에게는 “네 맘껏 해라. 실수해도 좋다”며 어깨를 쳐 줬다.

지난해 11월 사우디아라비아 원정경기 때 골을 터트리자 선수들은 허 감독의 맏딸 화란씨가 쌍둥이를 순산한 것을 축하하며 요람을 흔드는 골뒤풀이를 펼쳤다. 허 감독은 “선수들의 골뒤풀이를 보면서 감동에 전율했다. 어린 선수들과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유럽 격파할 공격력 다듬겠다”=허 감독은 “이번 원정에서 얻은 것은 유럽을 상대로도 우리만의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며 “20시간 걸려 캠프에 도착해 시차에 시달리고 날씨도 나빴는데 우리 선수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다음 달 5일 남아공 월드컵 조 추첨이 끝나면 1월부터 남아공 현지에 캠프를 차려 적응 훈련을 한 후 스페인으로 옮겨 유럽팀과 다시 맞붙어 볼 생각이다. 바둑 아마 4단인 허 감독은 자신의 축구철학을 바둑 용어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에 빗댄다. 내가 안전하게 살아야 상대를 잡으러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허 감독은 “이제 골격이 탄탄해진 만큼 상대를 꺾을 예리한 공격력 다듬기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글=최원창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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