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아직도 IMF…감원대상 공포 시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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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7일 오후 A은행 전주지점에서는 평소 결근 한번 안할 만큼 건강했던 입사 15년차의 朴모(33·여)씨가 누적된 피로를 견디다 못해 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 가족들은 “하루쯤 더 쉬라”며 휴식을 권유했지만 朴씨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출근을 강행했다.

B은행 전주지점 직원 金모(38·여)씨는 며칠전 퇴근후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회사로 나와 곁에 두고 밤 12시까지 근무한 뒤 동료들과 함께 귀가했다.

金씨는 “보모는 귀가했고 남편은 당직이어서 애들을 따로 맡길데가 없었다”며 “하루에 두번 출근한 건 딱히 잔업이 쌓여서가 아니라 일찍 퇴근했다고 동료들이 뒷얘기를 하면 명퇴바람에 휩쓸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즘 은행원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눈물겹다. 98년의 1차 구조조정으로 인원이 대폭 줄어 업무가 늘어난 지점이 많은데다 2차 구조조정의 태풍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터넷 뱅킹 확산 바람도 감원요인이 돼 은행원들을 옥죄고 있다.

감원 태풍을 비껴가려면 개인·점포별로 고과경쟁에서 앞서거나 적어도 뒤쳐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퇴근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휴일 출근도 다반사일 수밖에 없다.

A은행 전주시 경원동지점의 경우 2년전만 해도 60명이던 직원이 현재 15명으로 줄었다.과거에는 외환·대출·수신 등 업무를 분담했지만 올들어 행원 한 사람이 모든일을 처리하는 ‘원스톱’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업무 폭주로 사실상의 퇴근시간은 오후 10시가 돼버렸고 대다수 직원들은 오후 11시 넘어까지도 남아 일한다.낮에는 고객섭외하랴 금융상담하랴 쫓긴다.실적이 개인별로 고스란히 적립돼 인사고과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매달린다.

밤에는 잔무를 처리하고 연체 독촉과 예금 유치 활동을 벌이느라 새벽까지 일하기도 한다. 이 지점 安모(33)씨는 “한달에 한번 정도 쉬는 것이 고작이지만 가족들도 직장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참고 살자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같은 은행 서울 홍제동지점 尹모(40)계장은 “2차 구조조정설이 나돌면서 고객들의 연체료 회수 등 실적을 쌓기 위해 오후 10시 이후에 퇴근하기 일쑤”라며 “경영개선을 위해 점포별 업무 강도가 1차구조정 때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말했다.

B은행 노조 관계자는 “4·13 총선이 끝나면 구조조정이 본격 논의될 것으로 보여 직원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C은행의 경우 노조측과 합의후 전직원이 올해 받아야 할 상여금·월차수당 등을 회사측에 반납키로 했다.

이 은행은 최근 신임 행장 취임 이후 상반기중 지점·인원 감축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해 직원들이 다시 불안에 떨고 있는 형편이며 공식적으로 점포의 영업시간도 늘렸다.

은행원들은 “외환 위기 이후 희생을 감수하며 허리띠를 졸라매온 직원들을 다시 퇴출시키려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면서도 “구조조정을 앞둔 상황이라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대석·양영유·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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