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색깔론과 '逆색깔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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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연전에 한 잡지사에서 '한국 좌파의 목소리' 라는 책을 냈었다. 책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흥미를 끄는 부분은 한국 좌파의 존재를 전제한 바로 그 책의 제목이었다.

한국에서 좌파(左派)라고 불리면 왕따당하기 십상이다. 그것은 남북 분단상황에서 특히 안보이념을 가장 큰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30여년의 군부통치가 우리 의식 깊숙이 각인해버린 이념적 화석화 현상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분명 좌파인 사람이라도 '좌파' 라고 불렀다간 죽기살기식의 반발에 부닥치기 일쑤다.

그래서 우리사회에는 우파(右派)만 있고 좌파는 없다. 좌파들은 진보주의라는 포괄적인 언어 뒤로 숨어버린다.

그런 판에 감히 '좌파' 를 당당히 자처하고 나섰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념으로 대접받고 이름있는 사회주의 전력의 지식인들 조차 탈사회주의.탈좌파를 천명하는 판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시대적 변화라고 생각된다.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한 세력으로서 존립할 수 있는 사회, 설령 다수파에 대해 적대적일 수 있는 의견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개방사회로 가고 있는 징조라고 보았다.

얼마전 JP라는 한 노회(老獪)한 정치인이 또 색깔론을 들고 나왔다. 찬탁.반탁이 어떻고 친북파 장관이 어쩌고 하는 얘기를 꺼냄으로써 그는 자신이 명예총재로 있는 자민련을 보수세력으로, 그리고 그들이 얼마전까지 손잡고 함께 권력을 누렸던 민주당정부를 좌파로 몰아세우려는 작전인 듯싶다.

보수심리를 자극해보려는 극우(極右)보수파다운 선거전술이었지만 그 반응은 시원찮았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이른바 386세대들이 출마한 선거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386후보들을 두고 "북 어디에선가 날아든 빨간새" 라든가, "전대협의장을 지낸 의심스러운 사상전력" "주사파(主思派)" 라고 헐뜯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어느 한쪽 당에만 몰려 있는 게 아니라 여야당에 골고루 소속돼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다 이들이 기성의 중진정치인들을 위협하며 상당히 많은 지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모두 사상전력이 의심스러운지, 아니면 이들을 공천한 당들의 노선이 불투명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이런 현상들은 이제 이들 역시 이 사회의 한축을 이루는 한무리의 세력으로 인정받게 된 증좌라고 생각된다.

사상의 연좌제(連坐制)가 아직도 깊이 뇌리에 박혀 있는, 스스로를 보수파로 생각하는 사람이 80%가 넘는 사회에서는 보수논쟁을 벌이고 안보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유효한 선거전략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이미 96년 총선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이번 총선은 보다 선명하게 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편가르기의 근저에는 안보위기의식을 도구로 삼아 진보적, 또는 좌파적 소수를 억압하고 배제하려는 우파전체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다고 본다. 색깔론의 가장 위험스러운 부분은 바로 그와 같은 권위주의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의견의 통제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최근 이와 비슷한, 그러나 반대방향의 조짐들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진보적' 세력을 중심으로 여론의 편가르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지역감정의 일률적인 보도금지합의처럼 선거보도.언론정책 등에서도 이상한 흐름들이 감지되고 있다.

시민단체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부 진보적인 세력들은 특히 보수층이나 다른 자유주의적인 의견을 선악(善惡)의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재단해버린다.

그들 편에 서는 쪽은 선이고 아니면 악이다. 그들과 다른 의견, 그들과 틀린 의견은 '반개혁적' 인 것으로 단죄하기 일쑤다. 때로는 인신공격적인 수법마저 동원해 그들과 '다른 의견' 을 배척하고 재갈물리려 한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또하나의 '진보적 획일주의' 일 수 있으며 개혁을 빌미로 한 또다른 '역(逆)색깔론' 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양극단(兩極端) 속에서 합리성을 회복하는 개방적 담론들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때라고 믿는다.

김영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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