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안정효가 쓴 '가짜영어 사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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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국가대표 운동 선수들이 세계 대회에 나가 잘 쓰는 말이 있다. '파이팅(fighting)' 이다.

태권도나 탁구처럼 외국 선수와 가까이에서 경기를 하는 경우에도 주먹을 불끈 지으며 곧잘 '파이팅' 을 외친다.

그것이 "너 한판 붙어보겠냐" 고 시비를 거는 행동으로 보인다는 것을 아는 선수가 몇이나 있을까. 우리네 말로 그야말로 "잘 해보자" 는 뜻이지만 그게 외국선수에게는 거슬리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응원 나온 관중들까지 일제히 파이팅을 외치고 있으니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알리 없는 외국인들은 이맛살을 찌푸릴만 하다.

우리 주변에는 대화 속에 영어를 마구 섞어쓰면서 그것이 마치 외국어 실력이나 되는 듯 우쭐대는 이가 한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는 전혀 없는 말이거나 용례가 틀린 것들이 적지 않다.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으로 알려진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씨가 국내에서 남용.오용되고 있는 국적불명의 영어를 총망라한 '가짜 영어사전' (현암사.1만8천원)을 펴냈다.

2년이란 집필 기간을 거친 책답게 단어와 뜻풀이만 나열해 놓은 사전이 아니다. 다양한 예문과 날카로운 문체로 외래어 남용.오용의 허를 찌르고 있다.

안씨는 "평생 외국인과 대화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없는 한국 사람들끼리 우리말은 내버려 두고 불량 외래어를 남용하는 게 안타까워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고 말한다.

저자가 이상한 영어를 유포하는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TV다. '반쪽짜리 영어, 튀기 영어, 쭉정이 영어가 첨단을 달리고 있다' 고 지적한다.

일본 TV 프로그램을 모방하면서 일본식 외래어가 들어오는데다 연예 프로그램 출연자들 가운데 억지 외래어를 쓰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이다.

신문.잡지도 예외가 아니다.

꼭 대중매체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외래어를 꼼꼼히 따져보면 너무 한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매니아(mania)' 가 그런 경우. 웹스터 대사전은 '난폭하거나 격렬한 정신적인 장애로 인한 비정상적인 흥분 혹은 강박관념이나 광기' 로 정의한다. 그렇지만 국내에서는 매니아가 영화나 컴퓨터 등 특정 분야에 빠진 사람들을 가르키는 긍정의 뜻으로 쓰여진다.

뜻도 그렇지만 용례도 적절치 않다. 매니아는 일본의 가미카제(神風)숭배와 같이 '집단적인' 현상을 가르키는 말이지 광적으로 좋아하는 '개인적' 취미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매니아를 진짜 영어로 표현하면 'buff(버프)' 나 'bug(버그)' 정도가 맞다.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필이 팍팍 온다" 는 말이 있다.

느낌이란 뜻으로 필(feel)을 쓰지만 이는 외국인에게는 피임약(pill)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feel은 명사로는 촉감을 의미해 '필이 좋다' 를 굳이 해석하면 '감촉이 좋다' 정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밖에 일러스트(일러스터레이션.illustration).언더(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처럼 단어의 목을 잘라버리고 머리만 쓴다든가, 멘트(statement나 comment의 접미사)처럼 단어의 꼬리만 잘라 사용하는 경우, 모토사이클(motorcycle)대신 오토바이로 쓰듯 출처가 불명한 단어 등 안씨가 지적하는 가짜 영어는 모두 9백90여 단어에 이른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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