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과대망상에 빠진 한국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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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난 8월 말 베이징(北京)에서는 중앙일보 주최로 한국과 중국 경제 전문가들이 모여 양국의 경제발전 단계를 토론하는 세미나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한국 경제를 평가하는 피성하오(皮聲浩)라는 중국 학자의 발언이 화두가 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들먹이며 점잖게 나가던 그가 "한국 경제는 대학입시에 떨어진 고등학생 같다"고 일침을 놓는 게 아닌가. 충격이었다. 발가벗겨져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난 느낌이 딱 이랬을 것이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고 푼수 모르고 까불다가 외환위기를 당한 우리 경제의 모습을 제대로 그린 것이다. 더욱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대학생 흉내만 내려고 하는 것이 영락없이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춘기 고등학생이 틀림없다. 반면 중국은 아직 일인당 소득에 있어서는 한국에 뒤지지만 워낙 덩치가 커 선진국들도 급성장을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래서 내가 "한국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춘기 고등학생 같고 중국은 체중이 100㎏쯤 되어 대학생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중학생 같다"고 말했더니 중국 측 인사들이 자존심이 상하는지 안색이 변하며 "문화적으로는 중국이 대학생이고 한국은 중학생"이라고 금방 되받는다. 경제와 달리 객관적 측정이 어려운 문화를 가지고 학력을 매기는 게 억지라고 생각되었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질까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어느 TV와의 대담에서 앞으로 5년에서 10년 내에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대등한 역량을 갖게 될 것이고, 올해 국민소득 증가율은 OECD 국가 중 거의 1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대학입시에 떨어진 고등학생'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춘기 고등학생'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사춘기 고등학생은 자꾸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한다. 어른 옷을 입고 담배를 꼬나물고 술을 마셔도 누가 특별히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열심히 돈 쓰며 놀기만 한다. 일찍 배운 술.담배로 다른 고등학생들보다 체중이 적게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자란 대학생 체중의 증가속도와 비교하고서는 자기가 제일 잘 자란다고 자위하고 있다.

사춘기의 방황이야 있을 수 있다. 너무 오래가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오히려 좋은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언저리에서 7~8년을 까먹고 있어도, 거미줄처럼 성가신 온갖 규제로 기업 환경이 묶여 있어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틀이 건재하다면 방황을 멈출 때 다시 힘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잠시 방황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진로를 엉뚱한 곳으로 잡으려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학교도 안 다니고 건들거리는 부랑아 친구를 불쌍히 여겨 돕는다 하더니 요새는 아예 그 친구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우리 집 구조를 바꾸고자 한다면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부랑아를 돕는 것과 데리고 같이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아직 그럴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다.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이 활보하는 상황에서는 경제 성장도 어렵고 민주주의도 보장하기 어렵다.

우리 선배들은 지난 50년 동안 변변한 자원도 없는 환경에다 무서운 안보 위협 속에서도 세계가 놀라는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아픈 상처들이 있지만 정치적 자유도 크게 신장됐다. 그리하여 무려 5000년 동안 줄곧 죽어지내던 중국에 지난 20년간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지내는 떳떳한 세상을 만들었다. 이런 세상을 후세들에게 온전히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중국은 엄청난 덩치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일본 역시 침체에서 벗어나 동북아 주도권 유지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일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