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0> 잊혀졌던 사상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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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봄 베이징대학 동료 교수들과 중산공원(中山公園)에 산책 나온 장선푸(오른쪽 첫째)와 리다자오(왼쪽 둘째). 철학자 량수밍(梁漱溟·오른쪽 둘째)과 레이궈넝(雷國能). 김명호 제공

1962년 3월 광둥성 광저우의 한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나는 장선푸(張申府)와 류칭양(劉淸揚)에게 감사함을 잊은 적이 없다”며 장선푸를 회상했다. 총리의 입에서 14년간 금기시되었던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자 참석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우는 계속했다. “그는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사람이었다. 공자·버트런드 러셀·마르크스·프로이트·아인슈타인의 사상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가 뽑아낸 것이 장선푸의 사상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인 중국공산당의 창건자 중 한 사람이며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현대철학의 발전에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사람이 장선푸였다.

1917년 가을 24세의 장선푸는 베이징대학 교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로부터 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친구를 통해 도서관장 리다자오를 소개받고 문과대학장 천두슈와도 이내 친숙한 사이가 됐다. 천은 자신이 주편으로 있던 ‘신청년’에 장선푸를 끌어들였다. 장은 중국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소년중국학회’와 ‘신조사(新潮社)’에도 가입해 서구의 신사상과 인물들을 쉴 새 없이 소개했다. “나는 새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게걸들린 사람처럼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소개했다. 새것을 접하면 지난 것은 금세 까먹었다. 러셀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신문화운동이 본격화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공자점(孔子店:공자사상의 추종자) 타도를 외쳐댔다. 장선푸는 가장 선진적인 인물이었지만 “공자점 타도의 목적은 공자를 구출하기 위한 것” 이라며 전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장선푸가 마르크스주의 전파에 열을 올린 계기는 순전히 리다자오와 천두슈 때문이었지만 파급력은 리와 천을 능가했다. 공산당 설립에 의견을 모은 세 사람은 천이 상하이를 맡고 리와 장은 베이징을 담당하기로 합의했다.


1962년 3월 광둥성 광저우의 한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나는 장선푸(張申府)와 류칭양(劉淸揚)에게 감사함을 잊은 적이 없다”며 장선푸를 회상했다. 총리의 입에서 14년간 금기시되었던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자 참석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우는 계속했다. “그는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사람이었다. 공자·버트런드 러셀·마르크스·프로이트·아인슈타인의 사상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가 뽑아낸 것이 장선푸의 사상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인 중국공산당의 창건자 중 한 사람이며 마르크스주의와 중국 현대철학의 발전에 지워질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사람이 장선푸였다.

1917년 가을 24세의 장선푸는 베이징대학 교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로부터 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친구를 통해 도서관장 리다자오를 소개받고 문과대학장 천두슈와도 이내 친숙한 사이가 됐다. 천은 자신이 주편으로 있던 ‘신청년’에 장선푸를 끌어들였다. 장은 중국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소년중국학회’와 ‘신조사(新潮社)’에도 가입해 서구의 신사상과 인물들을 쉴 새 없이 소개했다. “나는 새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게걸들린 사람처럼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소개했다. 새것을 접하면 지난 것은 금세 까먹었다. 러셀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신문화운동이 본격화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공자점(孔子店:공자사상의 추종자) 타도를 외쳐댔다. 장선푸는 가장 선진적인 인물이었지만 “공자점 타도의 목적은 공자를 구출하기 위한 것” 이라며 전통을 부정하지 않았다.

장선푸가 마르크스주의 전파에 열을 올린 계기는 순전히 리다자오와 천두슈 때문이었지만 파급력은 리와 천을 능가했다. 공산당 설립에 의견을 모은 세 사람은 천이 상하이를 맡고 리와 장은 베이징을 담당하기로 합의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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