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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빛내기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된 남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41호 04면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제왕이다. 국내에도 팬층이 두텁다. 영화나 드라마 리메이크물도 족족 히트했다. 올 들어 국내에는 히가시노 원작 영화가 두 편 개봉했다. 일본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에 이어 우리 영화 ‘백야행’이다. 특히 ‘백야행’은 소설은 물론이고 10부작 일본 드라마마저 국내 팬들에게 익히 알려진 상황이라 난항이 예상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예 박신우 감독은 원작에 함몰되거나 짓눌리지 않은 채 자기만의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다. 데뷔작으로는 기대 이상의 합격점이다.

영화 ‘백야행’, 감독 박신우, 출연 손예진 고수 한석규

첫 장면은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를 배경음악으로 한, 강렬한 교차편집이다. 환한 빛이 가득한 호텔방에서 섹스를 하는 미호(손예진). 상대는 미호가 결혼을 목표로 공략 중인 중년의 대부호다. 같은 시간 요한(고수)은 어둠 속에서 핏빛 살인극을 벌인다. 14년 전 과거의 비밀을 들고 찾아온 이를 잔혹하게 난도질한다. 빛과 어둠, 흑과 백이 교차되는 이 장면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히가시노가 각색에서 유일하게 교체 절대불가를 요구했다는 제목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의 의미가 암시되는 장면이다. 누군가는 빛이 되고, 누군가는 빛을 위한 어둠이 되는 사랑 이야기. 그래서 ‘하얀 어둠’이다.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피해자 신상을 조사하던 경찰은 14년 전 살인사건에 착안한다.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고, 과거 수사를 맡았던 형사 동수(한석규)가 합류한다.퍼즐을 끼워 맞춰가는 미스터리 수사물적인 재미와 구성이 치밀하다. 그러나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랬듯, 히가시노의 원작은 어느 순간 단순 추리물을 뛰어넘어 처연한 멜로드라마로 발화한다.

매번 범인의 정체를 도입부에 드러내는 과감한 구성도 그래서 가능하다. 범인보다 범행의 동기를 쫓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극한의 행동은 무엇인가를 묻는 궁극의 순애보다.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짝사랑하는 이웃집 여자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해 자기가 살인을 저지르는 천재 수학자를 등장시켰던 작가는, 진실을 알게 된 옆집 여자에게 “도대체, 나 같은 게 뭐라고, 왜?”라는 마지막 대사를 주었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비틀린 욕망 때문에 서로의 운명이 된 미호와 요한의 사랑 또한 비극적이다. 엔딩에서 천사 날개가 달린 듯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미호가, 피투성이로 쓰러진 요한을 외면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장면은, 평생 모든 것을 다 바쳐 연인을 빛의 세계로 올린 한 남자의 최후에 대한 강렬한 스냅 샷이다.
박신우 감독은 미대 출신답게 빛과 공간, 색채에 대한 깊은 이해력을 구사했다. ‘추격자’ 이창재 촬영감독의 유연한 카메라와의 호흡도 좋다. 손예진·고수·한석규 등 배우들도 이름값을 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로 위장하며 살아가는 미호와 요한이 매주 한 차례 길 건너 커피숍과 와인바에 각각 앉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존재감만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울컥한다면, 당신은 이미 하얀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셈이다. 물론 원작을 읽지 않거나 사전 정보가 없을수록 영화에 대한 감도가 높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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