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기다림은 그리움, 그걸 놓치면 인생을 놓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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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푸른숲
192쪽, 1만원

스위스의 3대 현대작가로 꼽히는 페터 빅셀(사진)이 다시 왔다. 책상을 양탄자로 부르는 남자를 통해 산업화에 따른 인간 소외와 의사소통의 부재를 절제된 문장과 시적 내용으로 담아냈던 『책상은 책상이다』의 작가다.(이 작품은 우리 중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장편(掌篇)소설이란 독특한 장르에서 기발한 상상력과 따스한 유머를 뽐냈던 그가 이번에 낸 책은 산문집이다. 주간지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은 것이어서 조금 색다르다. 스위스의 소도시 졸로투른에서 집필활동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전작의 주인공들처럼 등장인물들이 선거에서 무효표를 계속 던지거나 기차시간표를 몽땅 외워버리는 등 보통사람의 기준으로는 특이하고 이상하게 보입니다.

“내 (작품의) 인물들은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들의 진지한 태도나 삶을 통해 우리의 바쁜 일상을 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장 ‘기다림을 기다리며’에는 “롤프는 중병에, 죽을 병에 걸려 있었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처럼,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도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효율성을 앞세우는 삭막한 현대사회에 대한 작가의 반발일까.

[푸른숲 제공]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떠올리게 하는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다림’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다림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문학의 핵심이란 점에서 나에게 기다림이란 삶의 중심과 같은 그 무엇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사회와는 거리가 먼 일이지만 기다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인생 전체를 놓치는 겁니다.”

-책을 보면 ‘관찰하기’나 ‘이해하기’보다 ‘보기’와 ‘듣기’ 같은 원형적 행동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관찰은 능동적이고 의도적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지 미리 알고 있지요. 보기는 약간 다릅니다. 별다른 목적 없이 비생산적으로 그냥 존재하기와 비슷하지요.”

작가는 책에서 동물원에서 동물이름을 가르치려 애쓰는 부모와 달리 이름과 상관 없이 동물들에 감탄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르면서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는다. 또 국가 대항 운동경기를 보며 ‘민족’을 들먹이고 열광하는 장면을 보며 “죄송하지만 나는 이런 민족에게 탈퇴하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무의미한 일의 가치,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나는 기쁨을 통해 ‘눈앞의 것’과 ‘지금 이 순간’에만 몰두하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해 보였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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