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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에서 국익 챙긴 정세균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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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취임 16개월 만에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지난 12일 오후. 정 대표와 일본의 집권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과의 30분간 면담 결과를 발표하는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일본에 새 정권이 들어선 만큼 북·일관계가 호전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정 대표의 말에, 오자와 간사장은 ‘일본이 납치 문제 해결에 구애받지 않고, 그 문제(북·일 관계 개선)에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일본 집권당 원내대표가 일본의 대북정책이 전향적으로 바뀔 것임을 정 대표에게 처음 확인해준 겁니다.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바로 그날 일본을 찾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회담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북한은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통해 여전히 동북아시아와 국제사회 안전에 주요한 위협(major threat)임을 보여줬다”며 "북한은 아무 전제조건 없이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변한 게 없는 일본의 대북 강경 기조는 전날 정 대표가 오자와 간사장에 이어 만난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의 말에서도 확인됐다. 오카다 외상은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결과를 보고 대응 방향을 정하겠다. 6자회담 참가국들과 공동 보조가 중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이 전략적 결단(핵 폐기)을 내려야만 대북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다는 미국의 입장을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오자와 간사장이 “북·일 관계 개선에 결론을 내겠다”고 정 대표에게 큰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그 말에 앞서 “내각 구성원이 아닌 만큼, 개인적으로 말하자면”이란 사족을 달았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노회한 일본 정객의 ‘립서비스’에 속았다고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오자와 간사장의 말은 일본 집권당의 1인자가 한국의 야당 대표에게 공식적으로 한 발언이다. 앞으로 정 대표를 포함한 한국 정치인들은 오자와 간사장을 만날 때마다 그의 이번 발언을 화두로 삼으며 대북관계 개선을 촉구할 수 있게 됐다.

정 대표도 이번 방문에서 제대로 된 ‘의원외교’의 필요성을 몸으로 절감한 점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 주변 강대국 리더들과 진실되게 이해를 넓혀가야만 그들의 생각을 바꿔갈 수 있다는 깨달음은 정 대표가 국내에만 머물렀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소득이다. 또 정 대표는 재일동포들의 숙원인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를 앞당기겠다는 오자와 간사장의 답변을 끌어내는 공도 세웠다. 외교엔 여야가 없다. 정 대표는 첫 외국여행에서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야당 영수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정 대표와 민주당은 외교에서 보여준 존재 가치를 국내에서도 입증해야 한다. 정부·여당의 실정은 호되게 비판하되, 협력할 건 협력하는 합리적인 모습을 기대한다.

강찬호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