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불복종운동 '비판적 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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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 마지막 날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다. 친구 크리톤이 찾아와 탈옥 준비가 됐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스스로 받아들인 법체제아래서는 비록 법당국이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그 결정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라고. 월든(Walden)숲속의 현자(賢者) 소로우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편다.

정부가 정의와 양심에 어긋나는 정책을 취한다면 '현명한 소수자' 는 여기에 불복종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고. 그는 노예제도 폐지론을 옹호하는 한편 미국의 멕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면서, 정의롭지 못한 정부에 세금을 내느니보다 감옥에 갇히는 길을 택했다.

소로우의 시민불복종론에는 '현명한 소수자' 의 우월성이 은연중 전제돼 있고 그런 점에서 평등원리에 비추어 문제를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뿌리를 두면서도 좀 더 다듬어진 시민불복종론은 그후에도 끊이지 않는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반전운동으로 미국 사회가 크게 흔들릴 때 학자들 사이에 시민불복종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과연 시민불복종을 인정하고서 사회질서 유지가 가능하겠느냐고 묻는다. 아울러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초한 사회계약의 권리와 시민불복종이 조화될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대해 시민불복종 옹호론자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다수결 원칙과 사회계약론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고 바로 거기에서 시민불복종이 인정될 수 있는 입지가 생긴다.

말하자면 한정적 조건아래서 제한된 범위의 시민불복종이 인정된다는 주장이다.

사실 입헌민주주의 정부아래서 시민불복종이 인정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잘라 말하기는 매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의 논의에서 가슴에 와 닿는 한 대목이 있다.

'정의론' 으로 널리 알려진 존 롤즈는 '정의에 대한 중대하고 명백한 침해' 의 경우에 시민불복종이 인정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입헌정부아래서 정당한 시민불복종이 적절히 행사된다면, 이는 정부를 더 확고히 정의롭게 만드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과 관련, 시민불복종론 공방이 일고 있다. 단체의 선거운동금지를 규정한 선거법 제87조의 개정에는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집회.서명 등의 운동방식을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단체간에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입법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칫 낙선운동 주도인물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 한편 공천부적격자 선정의 공정성 여부 또는 각 정당에 대한 차별적 효과 등과 관련해 낙선운동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총론에서는 전폭적 지지를 받은 낙선운동이 각론에서는 여러 비판에 부닥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선거를 앞두고 혼란이 가중된다면 시민불복종을 부정하는 법질서 옹호론이 더욱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확고한 판단이다. 수십년간 더덕더덕 쌓인 정치권의 악폐야말로 '정의에 대한 중대하고 명백한 침해' 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만 낙선운동 지도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개혁운동은 늘 각론의 과정에서 좌절돼왔다. 이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지도자들의 냉철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분적인 문제점 지적에 대한 과민하거나 독선적 반응은 삼가야 한다. 힘이 있는 곳에 비판이 따르게 마련이다. 특히 낙선운동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 들을 적대자로 몰려는 충동질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시민정치혁명을 유산시키려는 '음모' 일지 모른다.

양건<한양대 법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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