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前 北축구대표감독 윤명찬씨 '3대 상봉' 南서 첫 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지난해 4월 홀로 귀순한 북한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윤명찬(尹明燦.51)씨는 설을 서울에서 아버지.아들.딸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됐다.

남한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만난 데다 귀순 이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연이어 '사선(死線)' 을 넘어와 기적의 '삼대(三代)상봉' 이 이뤄진 것이다.

尹씨의 가족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만큼이나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가 평양에서 태어난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 봉익(89)씨가 홀로 월남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홀어머니 임봉숙(84년 작고)씨는 식당일.철근조립공 등으로 두 자식을 길러냈다.

두 살 위인 그의 형은 중학교만 졸업한 채 직업전선에 나섰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尹씨의 희망은 축구였다. 1m80㎝에 육박하는 키에 공차기에 남다른 재주를 보인 그는 평양 용북고등중학교를 졸업한 64년 북한 최고의 축구단인 2.8체육단에 발탁됐다.

68년부터 8년 동안 아시아 최고의 스위퍼로 북한 축구 국가대표를 이끌었다. 76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구락부 감독을 거쳐 86년 북한 국가체육위원회 부서기장, 90년 국가대표 축구단 단장, '92년엔 국가대표 감독 겸임 등을 통해 북한 축구계의 실세로 떠올랐다.

그가 서울을 찾은 것은 두차례. 90년 10월 남북통일축구대회와 91년 5월 청소년 남북단일팀 구성 등을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혹시 아버지가 살아 있지 않나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해외에 자주 나갈 수 있는 尹씨는 그 후로도 아버지 소식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미국 하와이에 사촌누나 尹종찬(74)씨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92년 1월 초. 누나는 아버지가 생존해 서울에 살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누나에게 아버지를 중국으로 모셔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마침내 그해 7월께. 尹씨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베이징(北京)에 들렀다.

공안요원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그는 40여년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짧은 재회였다.

98년 7월초 그에게 위험이 감지됐다. 북한 공안기관에서 그가 아버지와 연락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2남 1녀의 자녀와 부인을 남겨두고 탈출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가 나가 탈출 루트를 뚫기로 했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7개월간 중국에서 숨막히는 도피생활 끝에 99년 4월 25일 남한으로 들어오게 됐다.

연이어 그해 7월과 10월에 각각 장녀 윤혜련(尹惠蓮.24).장남 윤용(尹龍.26)씨도 한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중국에서 북한 요원에게 발각돼 다시 이송됐다.

그리고 남은 가족 소식은 끊겼다. 지난달 28일부터 남한으로 넘어온 尹씨 가족은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尹씨는 "아버지와 함께 차례를 지낼 수 있어 너무 기쁘다" 며 "앞으로 한국 축구계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 말했다.

최민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