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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떠나고, 사업도 떠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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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자살은 충격적이다. 국내 굴지의 재벌 회장을 지낸 그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가족 간의 분쟁, 자식의 구속, 회사의 경영 악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정신과 전문의는 “박탈감과 소외감으로 인한 우울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 전 회장 자살의 막전막후와 CEO들의 남모를 고민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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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용오 회장 영정 앞에 선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자필 유서에 “회사 채무가 많고 운영이 어려워 힘들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지난해 둘째아들 중원씨가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아 구속 중인 점도 그의 인생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박용오 회장 자살 막전막후 #‘형제의 난’ 이후 두산 형제와 관계 끊어

지인들에 따르면 박 전 회장의 건강은 양호한 편이었다. 2개월 전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1주일 전쯤 미국에서도 진찰을 받았으나 특별히 건강에 이상은 없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의 한 관계자는 “치료 당시에도 특별히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고 말했다.

어머니 명계춘 여사 떠나보낸 아픔

과거 심장이 좋지 않아 혈관확장술을 두 차례 받은 적이 있지만 중증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은 수·목요일에는 강원도 용평에서 등산을 주로 했다. 그만큼 건강이 뒷받침됐다는 뜻이다. 다만 2005년 ‘형제의 난’ 이후로는 세간의 이목을 의식해 골프장은 찾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호방한 성격에 비추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줄었다는 점은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컸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박 전 회장은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며 고통을 종종 털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유서에서 나타난 것처럼 성지건설 경영이 어려워진 데다 형제 간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에 우울증을 겪어온 게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박 전 회장의 지인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난달 27일 만났을 때 박 전 회장은 올해 말에는 아들이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고, 새로 만든 해외건설팀을 통해 해외사업을 맡기려 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2005년 무리하게 두산산업개발을 독립시켜 분가하려 했던 것도 두 아들의 장래를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그런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두 아들은 두산그룹에서 쫓겨나고, 한 명은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까지 된 것이 그에게는 큰 상처가 됐을 수 있다. 한 측근은 “박 회장이 차남의 구속집행정지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아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와 ‘성지건설 회장 박용오’의 격차를 실감했을 수 있다.

2004년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던 아내와 사별하고, 2005년 형제와 절연한 그는 지난해 9월에는 두산 창업주인 고 박두병 초대회장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명계춘 여사를 떠나보낸 아픔도 겪었다. 당시 장례식 때 다른 형제들과 만난 뒤로는 가족들과 일절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은 올 2~3월 두산 지분까지 모두 팔아 두산그룹 형제들과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 연결된 모든 선이 끊어졌다. 부모와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형제와는 인연을 끊었고, 자식마저 한 명은 영어(囹圄)의 몸이 된 상황에서 올 들어 회사 경영마저 어렵게 된 것이다.

정신과 병원인 ‘마음과 마음’의 강성민 원장은 “사회적으로 알려진 CEO나 유명인사들은 일반인보다 자신의 고민을 남에게 드러내기가 더 어렵다”며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심리 상태를 가진 경우가 있고 그만큼 마음의 병도 깊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성지건설 경영난으로 사업의욕 급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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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용오 회장

또 다른 정신과 전문의는 “대개 자살은 우울증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면서 “형제 간의 분쟁 이후 대외관계가 줄어들었고, 사회적으로 교류의 폭도 줄어들었다면 박탈감, 소외감 등으로 우울증이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가 우울증이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혼자 살았던 박 전 회장의 정신과 심리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없었던 점은 분명하다. 이런 심리적 요인 외에 2005년 형제의 난 이후 인수한 성지건설이 건설경기 침체로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어온 것도 박 전 회장의 복잡한 심경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회장이 작년에 인수한 성지건설은 부동산 경기 침체의 여파로 영업실적이 악화되고 차입금이 대폭 늘어나면서 경영 압박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시공능력 순위도 50위권에서 65위로 하락했다. 2007년까지 9% 이상을 기록했던 영업이익률은 작년에 5.4%로 떨어졌고, 올해 상반기에는 1.7% 수준까지 밀렸다.

2007년 187억원이던 영업이익은 작년 136억원으로 대폭 줄었고 올 상반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은 18억원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순차입금은 2006년과 2007년에 369억원과 1006억원에 불과했으나 작년에는 1388억원으로 늘었고 올 상반기에는 1244억원으로 치솟았다.

2007년까지 100%를 밑돌던 부채비율은 작년에는 168.4%로 늘더니 올 상반기에는 180.7%까지 확대됐고 차입금 의존도도 40%를 웃돌았다.

두산가 사실상 제명으로 외로움 증폭

성지건설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성지건설의 부도설이 심심찮게 흘러나왔다”면서 “‘형제의 난’으로 두산가에서 축출된 후 마지막으로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성지건설이 좌초 위기에 놓이자 박 전 회장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명예회복을 위한 자신의 마지막 도전마저 여의치 않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권가 관계자는 “심각한 자금압박과 함께 사업추진 과정에서 겪은 외로움도 박 전 회장의 극단적인 선택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결국 차입금 증가로 금융비용도 급격히 늘어나면서 박 전 회장은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린 것이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형제의 난 이후 두산가에서 사실상 제명돼 사업추진 과정에서 겪은 외로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데 한몫했다는 전언이다. 형제 간의 불화와 모친의 타계, 자식의 구속 등 최근 4~5년간 박 전 회장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동시에 겪었다. 거기에 사업까지 어려워지면서 그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화려할수록 공허하다

유명인 잇따른 자살 왜?

통계청이 최근 집계한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는 지난해 1만2858명으로 전년도 대비 684명 늘었다. 사망 원인별로는 암과 뇌혈관 질환, 심장병에 이어 네 번째에 해당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 도중 절벽에서 몸을 던졌으며 탤런트 최진실씨도 죽음을 선택하는 등 유명인의 자살도 끊이지 않는다.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등도 같은 경우다. 자살은 절망감과 불행감, 외로움 등에 따른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 ‘우울증’으로 발전했을 때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여기서 기업인과 저명인사는 일반인보다 소외감이나 절망감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듯이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자신과 실제 자신이 다르지만 자존심 등으로 그걸 사실대로 드러낼 수 없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과 교수는 “최고경영자(CEO)들이 비교적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비즈니스 등을 위한 공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오히려 정서적으로 취약한 ‘절대고독’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 전 회장은 물론 노 전 대통령, 정 전 회장, 남 전 사장 등 모두 한때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가 한순간 수치심을 느끼면서 자살로 이어진 경우다. 강 원장은 “유명인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직시하기보다 남이 보는 자신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그러다 보면 우울증과 자괴감, 무력감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 완숙해져 극단적 선택을 적게 하리라는 것도 큰 오해 중 하나. 나이가 많아지면 몸도 약해져 무력감과 인생의 고통이 커진다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신과 전문의 이진호 박사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정신과에서 금과옥조로 쓰인다”며 “나이가 많다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라고 말했다.

고독은 또 젊은이보다 노인이,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심하게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청년시절에는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을 하지만 60세가 넘어가면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위엄 등을 지키기 위해 속내를 털어놓지 못해 고독감에 괴로워한다는 것. 이를 뒷받침하듯 자살 사망자의 상당수는 60대 이상의 남성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60대 이상 남성 자살자 수는 2005년 이후 4000명 이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60대 여성은 주부로 지내며 동네 친구, 계모임 등 외부활동이 많지만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정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바쁘게 사는 CEO일수록 한가할 때를 생각해 취미와 인간관계에 더욱 힘쓸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는 돈보다 묽다

끊이지 않는 형제 간 분쟁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故)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4년 전 형제 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두산가(家)에서 제명됐다. 두산가 외에도 우리나라 20대 기업집단(재벌그룹) 중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나 다툼 없이 넘어간 곳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간 지분 분쟁이 일어났다.

이 일로 박찬구 회장은 석유화학 회장에서 해임됐고, 박삼구 회장도 그룹 회장직에서 사퇴했다.

두산그룹의 형제의 난이 있기 전에 가장 큰 사건은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이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한때 측근들까지 가세해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룹 경영권 싸움을 했었다.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연이어 그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현대그룹 왕자의 난은 그 명칭처럼 복잡하고 치밀하게 전개됐다. 결국 현대차 그룹이 분리되면서 형제 간의 다툼은 정리됐다.

SK 역시 사촌 형제 간의 지분 정리가 말끔히 되지 않았다. 고 최종건 창업주의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최종건 회장의 차남인 최신원 SKC 회장(장남 윤원씨는 사망)이 여전히 건재하다. 최신원 회장은 선친이 사업을 시작한 SK네트웍스와 마지막으로 인수한 워커힐 호텔 등에 강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범LG가는 경영권 분쟁 없이 지내온 거의 유일한 재벌기업이다. 구인회-구자경-구본무로 이어지는 장자상속이 철저히 지켜졌고, 유교적 가풍과 철저한 재산비율 준수로 분쟁의 소지를 없앴다. 구씨뿐 아니라 동업자인 허씨 가문(GS그룹)과 분리할 때도 큰 잡음이 없을 정도였다. 장자집안 외에 사촌들(LS, LIG, E1) 간의 재산분할도 말끔히 정리됐다.

롯데, 한화, 대림, 대한전선 등도 부자 간, 형제 간, 숙질 간 다툼이 있었다. 이외에 대성그룹은 창업주가 타계한 이후 형제 간 분쟁이 있었고, 동아제약은 아버지와 차남 대 장남 간의 경영권 갈등으로 홍역을 치렀다. 이처럼 큰 기업을 일군 가문 중 독자(獨子)가 아닌 대부분의 집안이 형제 간, 부자 간 다툼을 피하지 못했다. 혹자는 재벌가의 형제의 난을 보며 혀를 차기도 하지만 형제 간의 분쟁은 사실 재벌가만의 특징은 아니다.

인기 드라마였던 ‘주몽’이나 ‘대왕세종’에서도 형제 간의 분쟁은 있었다. 철저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왕자들조차 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싸움을 했다.

‘마음과 마음’ 수지점의 강성민 원장(신경정신과 전문의)은 “형제는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경쟁자”라며 “어떻게 보면 형제 간의 다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권력이나 재산 앞에서는 생각보다 묽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석호 기자·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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