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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사회적 대가 치른 ‘김종필·오히라 비밀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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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2005년 1월 17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김종필·오히라 메모..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외상 오히라와 만나 소위 ‘청구권 자금’의 규모에 대해 합의하고 양국 수뇌부에 건의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내용으로 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이른 시일 내에 한·일협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었던 청구권 자금의 액수를 밀실에서 합의했던 것이다.

김종필 부장은 회담 직후 “합의한 사실은 없고 쟁점에 대해 토의를 한 사실만 있다”고 밝혔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5000만 달러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지만, 한국 정부는 최종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합의를 극비에 부치며 한·일회담 수석대표에게도 알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훈령을 12월 1일 내려보냈다.

64년 초 야당과 학생들이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밀실에서 졸속으로 처리한다는 비판을 제기하자, 정부는 동년 3월 31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에게 김종필과 오히라가 합의한 내용을 공개했다. 그러나 당시 공개된 것도 합의 내용은 없고 한국 측과 일본 측이 제시한 액수만을 담고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서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인해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모 내용이 공개되었지만, 모든 내용이 공개되지 않음으로 인해 의혹이 더 커졌고, 이는 결국 6·3 사태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1월 한국 정부는 베일에 싸여 있었던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전격 공개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로 합의하고 수뇌부에 건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64년 정부가 공개할 때는 없던 것이었다. 메모의 내용이 62년 10월 17일과 11월 4, 8일에 박정희 의장이 지시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관련 문서는 공개됐지만 논란이 되었던 것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근거한 한·일협정은 45년 이전 한·일 간의 협약, 개인에 대한 피해 보상, 독도 문제 등 기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지금까지도 한·일관계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더 중요한 교훈은 국가적인 대사를 투명하게 처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한·일협정 이후에도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한 대북송금 특검, 한·미 간 쇠고기 협상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 시위 등은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