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블로그] 연탄 갈러 나갈 때 빨간 내복을 입은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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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BYC 70년대 내복 포스터]

  ‘빨간 내복’이 인기다. 롯데ㆍ현대백화점 등 주요 백화점에 따르면 내복 매출은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5일까지 작년 같은 기간보다 30% 이상씩 늘었다. 빨간색 내복은 전체 여성용 내복 상품 중 60% 이상을 차지한다. 왜 내복의 대표 컬러는 빨간색이 됐을까. BYC측의 도움으로 내복사(史)를 들어봤다. 내복은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ㆍ판매됐다.

해방 후 일본이 남기고 간 양말짜는 기계를 응용해 속옷을 만들어내던 한흥 메리야스(BYC 전신)와 삼남 메리야스(TRY 전신)가 내복계에 뛰어들어 시장을 양분했다. 당시는 섬유 염색 기술이 부족해 여러 색상의 내복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쥐색, 분홍색, 흰색 등의 내복이 출시되긴 했지만 생산성이 떨어져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가장 손쉽게 물들일 수 있는 색은 검은색이었으나 어찌 ‘때 탄’ 것처럼 보이는 검정 내복을 내놓을 수 있었겠가.

‘따뜻해보이기 때문에’ ‘상서로운 색이기 때문에’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나일론에 빨간 염료가 가장 쉽게 물들었기 때문에 내복의 대표 색이 됐다고 한다. 40여년 전 빨간 내복 가격은 쌀 한 가마니에 버금갔다. ‘쌀 밥’ 먹는 집에서나 입을 수 있을 정도의 고가품이었다. 부의 상징이었던 셈. 상황이 이러하니 일부러 소매 아래로 빨간 내복이 보이게 입기도 했다. 첫 직장을 얻은 자식은 부모께 드리는 첫 선물로 빨간 내복을 드렸다.

‘따뜻하게 품어줘 내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앞으로 내가 따뜻하게 해드리겠다’는 효의 상징성이다. 귀하디 귀한 빨간 내복을 자식에게 선물 받은 부모는 연탄불 갈러 나갈 때 일부러 내복만 입고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싼 내복을 보여주고픈 마음도 있었겠지만 취직한 내 자식이 선물해줬다는 것을 더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취업시즌인데 이래저래 어렵다. 통계청에 따르면 10월 실업자는 79만9000명이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6만3000명(8.6%) 늘었다. 구직자가 느끼는 경제 시장의 한파는 시베리아 벌판의 그것 이상이다. 구직자를 둔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왜 빨간 내복이 인기인가’에 대한 보도로 ‘신종플루 확산에 따른 감기 예방 차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앞으로 ‘직장을 얻어 부모께 효도하려는 예비 직장인들로 인해 빨간 내복이 품절됐다’ 기사를 보고 싶다. ‘호황=구직 성공=효도=빨간 내복’의 선순환식으로 말이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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