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황현 '절명시' 첫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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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지러운 세상

들 끓다가

어느덧 백발이 되었구나

그 몇 번이던가

목숨을 끊으려 했건 마는

여지껏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 더 살아갈 수 없어

참으로 죽음을 맞으려 하노라

바람 앞에서 퍼럭이는 촛불이여

푸른 하늘을 비추어 다오.

- 황현(1855~1910) '절명시(絶命詩)' 첫 수

나라를 빼앗기면 시인은 어찌해야 하는가.

매천(梅泉)황현은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하룻밤에 '절명시' 4수를 피처럼 토해내고는 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지리산 기슭 구례의 산골에서 글을 읽다가 과거에 두번씩이나 장원했지만 갑신정변으로 낙향, 나라 걱정은 산을 넘어도 힘 없는 선비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오직 하나, 죽음 뿐이었다.

꺼져가는 불빛이 푸른 하늘에 비추기를 바라는 그 살신성인(殺身成仁)에 하늘도 울었으리라.

이근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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