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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오디세이] 고구려산성 연구가 서길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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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한 민족은 기마종족이었다.

지금은 비록 대륙의 끄트머리 라이터 주머니같은 반도에, 그마저도 분단돼 갇혀 있지만 대륙을 말달리던 기상은 우리의 피 속에 여전히 맥동치고 있다.

고구려를 향한 그리움은 대륙을 향한 그리움이다.

지금 국토 어디쯤에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는 지역이 있다면 이 그리움의 농도는 훨씬 옅을 것이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며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발해가 망하지 않았으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고려가 명(明)과 한 판 붙었으면 지금도 이렇게 작은 땅에서 살까. 사실 가정의 역사란 망상에 가깝다.

역사 공부란 당시에 그렇게 결과짓게끔 한 동인(動因)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라의 정치.문화력, 발해의 내부 분열, 요동 정벌에 승산이 있었음에도 성리학 세력에 기댄 이성계의 야심 등등이 그런 동인일 것이다.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오늘의 한국은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방민족이 세운 요(遼)와 금(金).청(淸)나라의 전철처럼 중국의 한족(漢族)과 대립(고구려의 중국 지배도 가능했을 것이다)하다 용광로같은 중국에 녹아들어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구려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만주벌을 경영한 우리의 실재한 역사이고 그 장쾌한 기상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 유산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어디에 있는가.

말장난같지만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30분쯤 날아가면 있다.

중국 땅 선양(瀋陽)에서 내려 사방 어디를 가든 그 곳이 다 고구려의 옛 강역인 것이다.

그럼에도 고구려는 텅 비어 있다.

해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유럽으로, 미국으로 놀러가지만 고구려는 그저 일부 역사 혹은 골동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답사지 정도로 버려져 있다.

매끈매끈한 선진 문물 구경도 좋으나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역사를 찾아보는 즐거움은 생각하기에 따라선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히말라야 8천m급 14봉 완등을 추구하는 엄홍길도 그렇지만, 뭔가에 속된 말로 '미친' 사람이 뭔가를 이루는 법이다.

서길수(59.서경대 경제학과)교수는 고구려에 미쳐 있다.

그의 고구려 찾기는 대장정(大長征)으로 표현할 만하다.

1990년 고구려의 옛 수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환도산성을 만난 것이 출발이었다.

환도산성을 본 순간 "강한 영감" 에 이끌린 그는 다음 해 홀로 고구려 산성 탐험에 나서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의 오녀산성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올랐다.

93년 한학기 동안은 아예 옌볜(延邊)대 조선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가 50여개의 고구려산성을 답사했다.

그 기간 중 옌지(延吉)에 머무른 날은 열흘도 되지 않았다.

모든 탐사를 그는 오로지 지도 한 장과 변변치 않은 중국의 자료에 의지했다.

94년에는 다시 네번이나 탐사여행을 다녀왔다.

93~94년 동안 그 넓은 만주땅을 헤매며 찾아 간 산성이 1백30여곳에 달하는 참으로 열정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탐사였다.

그가 94년 서울에서 사진으로 공개한 고구려산성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역사의 저편에 그러나 실재하는 이 땅의 저편에 이끼낀 채 의연히 버티고 있는 성벽의 모습은 세월의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고구려 그 자체였다.

그 후 그는 고구려연구소를 창립하고 관련 학술대회와 연구서적 발간을 주도하는 한편 97, 98년 다시 답사여행을 다녀오는 등 본업인 경제사 연구외에 고구려 연구를 제2의 본업으로 삼고 있다.

- 환도산성을 보고 강한 영감을 받았다는 데 어떤 느낌이었나.

"처음 만주에 갔을 때는 안시성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하는 보통의 궁금증밖에 없었다.

그런데 환도산성의 산등성이에서 성벽을 보는 순간 고구려산성이 1천3백년 이상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 때 나이가 마흔여덟이었는데 내 인생의 50대를 여기 투자하자고 마음먹었다. "

- 고구려 전공학자도 아닌데 산성을 어떻게 찾으려고 했나.

"솔직히 말해 처음엔 무작정 갔다. 91년 여름방학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산둥(山東)반도를 거쳐 다롄(大連)에 상륙했다. 자료도 없고 지도도 없는 상태에서 수소문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고구려 첫 수도라는 환인에 가면 고구려 발상지인 홀본성(오녀산성)이 있겠지 하고 갔더니 정말 있었다. 당시 그 곳은 외국인에게 개방이 안된 곳이었지만 그래도 올라갔다. "

오녀산성은 1백여m의 절벽 위에 조성된 고구려의 첫 성으로 그 위에 길이 1천m.너비 3백여m의 평지가 펼쳐져 있다.

徐교수는 오는 2월초 일반답사단을 이끌고 그 곳에 여섯번째로 갈 예정이다.

- 93년에는 6개월 동안 50여개의 산성을 탐사한 걸로 되어 있는데 교통편도 그렇고 불편한 만주 땅에서 어떤 식으로 돌아다녔나.

"한마디로 길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 기차.버스.달구지.나룻배 등 모든 것을 이용했다. 기차의 경우 외국인에게는 1등석 표만 팔아 중국사람처럼 행세했다. 그들처럼 해바라기씨를 한됫박 사가지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떠도니까 진짜 중국인이 다 된 기분이었다. 잠은 주로 여행 중에 사귄 조선족 집에서 해결했지만 아무데서나 잤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

- 말씀은 쉽게 하지만 어려움이 굉장히 많았을 것 아닌가.

"그걸 일일이 말할 수는 없고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 중국에서의 여행은 불편함조차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제맛이 났다. 그러나 50이 넘은 나이에 혼자 하루에 몇차례씩 산을 오르내린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짐작으로 찾아간 산성을 발견하더라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사진찍고 기록하는 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한국인으론 내가 처음 하는 일이라서 신이 났다. "

그는 스스로 "사주가 발에 달려 있다" 고 말할 만큼 사실은 고구려 이전에 이미 여행에 미친 사람이었다.

자신이 '배낭여행의 시조' 라고 말하는 것에 걸맞게 68년부터 틈만 나면 외국에 나가 떠돌았다.

일본을 시작으로 73년 유럽, 82년 중남미, 83년 헝가리, 86년 중국, 87년 폴란드, 88년 쿠바 등으로 돌아다니다 89년말에서 90년초에는 동유럽과 시베리아를 집중적으로 여행했다.

이 모든 여행의 대부분을 배낭을 메고 때운 그는 동유럽과 시베리아여행의 결과를 '동유럽 민박 여행' 1, 2권과 '시베리아 횡단열차' 라는 책으로 묶어냈다.

아무리 배낭여행이라지만 남들은 한국에서 힘들게 사는데 팔자 좋게 무슨 외국여행이냐고 묻는다면 그에게는 '쇠말뚝 교수' 라는 반격이 준비돼 있다.

84년부터 94년까지 10년간 일제가 우리의 정기를 꺾는다며 우리 산 곳곳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혼자서 찾아다닌 것이다.

전국의 고을 곳곳 경로당을 찾아 노인들에게 물어가며 산을 뒤져 1백34군데의 쇠말뚝을 찾아냈다.

그 쇠말뚝 여행으로 그는 '풍수침략사 시론' 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 이란 단체를 만들어 쇠말뚝 뽑기 작업을 벌였다.

'아니 국내외를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면 도대체 가족과는 언제 지내나' 라는 물음에도 그는 그만의 비결을 소개할 자료를 갖고 있다.

매스컴에도 몇 번 짧게 소개된 '우리집 신문' 이 그것이다.

그는 가족간의 대화란 그냥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머니.아내.두 아들이 공동 '편집위원' 인 가족신문을 90년대 초까지 14년간 만들었다.

그리?그것이 화제가 되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문모음을 우송하기도 했다.

왜 혼자 여행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둘이 가면 옆 사람에게 신경쓰이지만 혼자 가면 전인류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 고구려 땅에 가 '만주는 우리 땅' 이라며 감상에 젖는 것은 아무래도 좀 유치한 느낌이 드는데, 우리가 과연 고구려 땅을 왜 가봐야 하고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는 게 좋겠는가.

"수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에 간다. 거기에서 저녁 기차를 타면 다음 날 아침이면 고구려 전기 수도 국내성(지금의 지안)에 닿는다. 백두산을 보고 지안에 안가는 건 불국사에 들렀다가 석굴암을 안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베이징(北京)의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보고 열등감을 느낀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많은 부분은 명나라때 쌓은 것이다. 고구려 산성보다 1천년이나 뒤늦게 쌓은 것이다. 고구려 산성을 먼저 보고 만리장성을 본다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역사를 볼 수 있다. "

- 인터넷 시대에 고구려를 신화화하는 건 시대를 거스르는 거대 혹은 사대(事大)콤플렉스의 발로일 수도 있다.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 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노래를 답답한 현실에 대한 울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만 발해를 꿈꾸면 그건 콤플렉스의 표현이 된다. 고구려나 발해는 지금은 분명 남의 땅에 유적으로만 존재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보고 느끼면 막연했던 고구려나 발해의 기상이 한국의 현실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바탕으로 대륙적 기상이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면 좋은 것 아닌가. "

그는 광화문 어디쯤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웠으면 하고 바란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지켰고 광개토대왕은 영역을 키웠으니 '지키며 키워가는' 상호보완적 정신교육으로 유용하지 않을까 해서다.

[서길수 교수는…]

▶1944년 전남 화순 생

▶국제대 졸.단국대 박사 (한국경제사)

▶서경대 경제학과 교수

▶(사)고구려연구회 이사장.문화재청 북한문화재 연구위원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임원 역임

▶ '고구려성' '고구려 역사 유적 답사' 등 저서와 '이이의 경제사상 연구' '고려시대 대차관계 및 이자연구' '고구려 수공업' 등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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