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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과 정착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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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실크로드에는 비단으로 덮인 길이 없었다. 중국 시안에서 둔황을 거쳐 쿠차까지 가는 머나먼 길은 자갈과 진흙.모래뿐인 황량한 사막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오아시스 길의 중심도시인 투르판은 일년 동안 16㎜의 비가 내리고 3000㎜의 물이 증발한다고 한다. 그날의 기온은 42도를 웃돌아 탈수증세를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험준한 톈산을 넘어 '마음의 고향'이라는 율두스 초원에 다다르니 상황은 정반대로 변했다. 여기는 실크로드 중에서 이른바 초원의 길이라 불리는 천산북로의 한 부분이다. 이 높은 초원에는 풀도 자라고 물도 흐른다. 밤의 기온은 영상 4도까지 떨어져 가져간 옷을 다 껴입고도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안개가 머금은 축축한 습기들은 뼛속까지 스며들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막의 열탕과 초원의 냉탕은 버스로 불과 반나절 떨어진 거리였다.

사막과 초원은 너무나 극단적인 환경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떨어질 수 없는 한 세트의 자연이기도 하다. 높은 톈산에 걸린 구름이 눈비가 돼 초원에 다 떨어지기 때문에 아래 사막에는 비 한 방울 구름 한 점도 찾아보기 어렵다. 초원이 없다면 사막도 없을지 모른다.

사막과 초원의 차이만큼, 두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는 너무나 다르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농사를 짓는 정착민들은 자신의 오아시스를 떠날 수 없다. 그들의 작은 정주지는 죽음의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초원에 사는 이들은 양떼를 키우며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들이다. 유목민들에게 정착이란 곧 고통이며 죽음이다. 며칠만 한 곳에 머물면 양떼가 뜯어먹을 풀들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길을 사는 것 같은 유목민과 정착민은 역사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던 보완적 존재들이었다. 기동력과 강인한 전투력을 갖춘 초원 유목민들은 사막 정착민들을 다른 외적의 침략에서 보호해 주고, 그 대가로 오아시스에서 나는 식량과 필수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서로 다름이 오히려 하나 되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까.

서울 강남의 역삼동 일대에는 이른바 '풀 옵션 원룸'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주택들이 퍼지고 있다. TV.냉장고.주방기구 등 가재도구 일체를 갖춘 임대용 방들인데, 더욱 신기한 것은 이들의 임대기간이 한달 혹은 보름 단위라는 점이다. 전세 2년, 월세 1년의 보통 임대기간에 비교하면 호텔이라고 할 정도로 짧은 기간이다. 이 집들을 임차하는 주 계층은 테헤란로 일대의 벤처기업 직원들과 소위 '선수'라고 부르는 야간업소의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대우가 낫고 조건이 좋은 직장이 나타나면 수시로 일터를 옮기기 때문에 그에 맞춰 집도 자주 이사를 해야 한다. 이삿짐이라 해야 옷가방 두세개가 전부다. 고정된 주거가 없으니 주소도, 주민등록도 필요없다.

마치 초원의 유목민이 말만 타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어디에서든 생활할 수 있듯 서울의 새로운 종족들은 휴대전화와 노트북 컴퓨터만 있으면 어느 집, 어느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생존이 가능하다. 서울의 유목민들이 선호하는 '풀 옵션 원룸'이 역삼동 일대에만 2만개가 있다고 추정하니, 이미 서울에도 유목민촌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2년마다 이사해야 하는 전세민들이나, 학군과 투자가치를 좇아 끝없이 이동하는 아파트 주민들 역시 유목민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유목민들에게 풍요와 위안을 줄 정착된 오아시스는 어디 있을까? 오래된 주택지와 골목길, 재래시장과 동네 선술집들, 줄지어 선 중고 서점과 맞춤복 양복집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도시의 오아시스들을 파괴하고 지워버렸다. 오아시스의 정착민 없이 유목민들만 살아남으면 서로 싸우고 죽이다 결국은 모두 공멸하고 만다는 것이, 결국은 거대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 실크로드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다.

김봉렬 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