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자유와 평등의 대립을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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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필자는 20세기의 절반 이상을 살면서 전쟁과 빈곤의 공포에 시달리는 한편 민주사회에 대한 소망을 품어왔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자유와 평등사상이 극단적으로 대결한 남북분단의 역사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 결과 참담한 전쟁을 겪었고 언제 다시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조마조마하면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다. 광복전후의 동년배들은 나와 비슷한 정신궤적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21세기를 이틀 앞둔 우리는 두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하나의 꿈이 영글어가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대단한 성취라 아니할 수 없다. 희생도 그에 못지 않게 컸음은 물론이다.

역사에 '만일' 이라는 가정법을 도입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북한 주석 김일성(金日成)이 1994년 7월 8일 사망했을 당시 "김일성이 6.25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 구체적으로 나의 오늘은 어떻게 됐을까" 라는 가정법을 몽상하고 있었다. 북한이 전쟁이란 극단의 방식으로 통일을 꾀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남북한이 공산치하로 통합됐을 것이라는 나의 추론 때문이었다.

이런 몽상의 기반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60년대말까지 남한보다 나은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식 국력의 조직화가 일궈낸 결과였다.

소련도 2차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60년대 중반 최고조의 국력을 과시했던 배경에는 공산당 특유의 총체적 동원체제에 힘입었음은 잘 알려진 얘기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치고 평등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공산체제의 우월성이 2차세계대전후 20여년간 작동되는 형세였다.

소련이 57년 스푸트니크 인공위성을 처음으로 외계에 쏘아올린 여세를 몰아 흐루시초프 공산당 제1서기가 59년 유엔총회에서 구두로 연설대를 후려치면서 "미국을 묻어 버리겠다" 고 호언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판국에 남북한이 전쟁없이 체제경쟁을 했더라면 필경 베트남의 재판이 남쪽에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냐는 나의 가정법이다.

전쟁 이전에도 남쪽에선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 등 크고 작은 좌익의 소요가 있었다. 4.19당시 반공정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두했던 일부 좌익적 분위기나 80년대 이후 군사폭압정권에 대한 무력감에서 발생했던 운동권의 좌경화는 그때그때의 논리와 동인이 어떠했든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평등주의의 소산이라고 분석된다.

우익정권과 자본가들이 손을 잡고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빈곤계층을 압박하는 상황이 지속됐기 십상인 남쪽에서 안으로는 좌익운동의 조직화가 이뤄지고 북쪽에서 후원하는 형세가 이뤄져 결국 베트남과 같은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어느 정도의 평등화는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북한체제의 경직성에서 드러나듯 절대적 빈곤에 허우적대며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유린당한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역사의 가정법이라는 몽상에 의지해 김일성의 '전쟁을 일으킨 결단' 에 역설적으로 고마움을 느꼈던 것이다.

실제의 역사에서 존경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는 대상은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이다.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진보파들의 혹독한 비판의 적(的)이 되고 있지만 우리를 빈곤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준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아무리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고 불편할 뿐이라곤 하지만 90년대 북한의 실상을 보면 부끄러움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북한의 자승자박적 경제개발 실패와 우리의 경이적 경제발전은 남북의 격차를 벌리면서 또다른 전쟁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도 새겨봄직하다.

박정희가 말년에 민주화의 용단만 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개발독재 비전과 실천이 고통스럽고 더디긴 하나 우리 사회를 민주적으로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됐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중산층의 두터움은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조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회 성원 모두가 민주사회를 가꿔야 하는 것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의 대립을 넘어 박애정신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애정신을 울타리로 해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고 더 나아가 북한까지 포용해 민족통일의 성업(聖業)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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