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0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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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제13장 희망캐기 39

산기슭 사이로 손바닥만한 개활지가 나타났고, 개활지 뒤쪽 멀리로 검은 곰처럼 웅크린 구룡덕봉의 산주름이 우쭐거리며 펼쳐져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일행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 지점이었다.

산기슭을 등지고 있는 그 개활지 한 켠에 2층으로 빚어 올린 덜썩큰 귀틀집 한 채가 마침 계곡으로 찾아든 오후의 잔광을 해바라기하며 너부죽하니 앉아 있었다.

그순간 승희는 안개가 뿌연 장마당으로 들어설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귀틀집 마당을 사이에 두고 새로운 가역을 벌이고 있어 서성거리고 있는 일꾼들 너댓의 모습이 멀리서도 역력했다.

허둥지둥 오솔길을 내려가는 일행들의 걸음걸이가 뒤숭숭했다. 귀틀집 앞마당에 서서 장작을 패고 있던 사내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지난날의 변씨처럼 구레나룻을 더부룩하게 기른 한철규였다.

"워매, 뭣땜시 이 산간오지로 들어와서 이 야단을 피우고 있당게?" "계방천 안개 걷어다가 수출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지요. "

"장돌뱅이 버릇 개줬뿌렀는 줄 알았는데 또 그 소리요?" 방극섭은 한철규의 손에 들려 있던 도끼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리고 모탕 위에 가로놓인 장작둥치 한가운데를 단매로 내려쳐 속시원하게 두동강을 내었다. 한철규는 나중 당도한 일행과 마주칠 때마다 덥석덥석 포옹을 나누었다.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구룡덕봉 매운 바람에 떨고 있는 일행을 미새로 올린 황토 비린내가 물씬하는 안방으로 안내하였다. 집안 어디를 둘러봐도 허드렛일 바라지를 하는 아낙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한기를 가다듬은 여편네들이 부리나케 부엌으로 나갔다.

희숙은 젖먹이를 핑계하고 설설 끓는 아랫목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 풀어던졌는지 머리를 싸동였던 스카프는 보이지 않았다. 밖에선 손바꿈으로 도끼를 건네받아 겨끔내기로 장작패는 소리에 구들장이 들썩거렸다.

힘자랑을 해대는 그들의 고함소리가 구룡덕봉 산주름에 이마를 받고 금방 메아리로 되돌아와 바람벽을 흔들어댔다. 부엌살림은 조촐했지만, 당장 소용될 것은 그런대로 얼추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쓰려고 들면, 상표조차 뜯지않고 보관된 것들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예기치 못했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묵호댁이나, 손달근의 아내나 한결같이 세간살이를 쓸 때는 승희의 동의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승희는 은연중에 조리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간섭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 집의 주부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어느덧 남정네들이 팬 장작더미가 귀틀집 서쪽 바람벽 위로 높다랗게 쌓이고 기름기 빼고 삶은 돼지고기가 가마솥에서 토실토실하게 익었다.

해가 지자마자 산그늘이 앞마당으로 성큼 들어섰고, 사방에는 스멀스멀 땅거미가 내렸다. 귀틀집 귀퉁이에는 어느새 고콜불이 켜졌다. 잔뜩 껴입었던 방한복을 벗어붙인 남정네들이 목로 주위로 조여 앉았다.

일행이 당도하는 날짜에 맞춰 걸러쓰도록 담가두었던 막걸리가 동이째 목로가에 놓여졌다. 박봉환이가 질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손달근이가 박봉환의 옆구리를 툭 쳤다.

한철규에게 건네준 막사발 가녘이 넘치도록 막걸리를 부어준 박봉환은 곧장 너부죽하니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한철규는 정말 구룡덕봉 산채의 두령이라도 된 것처럼 사발 막걸리를 숨 한차례도 가다듬지 않고 단숨으로 들이켜고 사발을 박봉환에게 다시 건넸다.

그렇게 해서 배완호까지 한 순배가 돌았다. 그러나 오늘밤은 여자들도 예외를 두지 않고 모두 한 사발씩 마시기로 하였다. 방은 문을 열어두어야 할 정도로 더웠다.

젖먹이를 가진 희숙을 윗방으로 보내고 방문을 활짝 열기로 하였다. 시린 달빛이 밀물처럼 방안으로 휩쓸려들었다.

"한두령, 저 아래채는 누굴 주려고 짓고 있어라?"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만, 그 집은 형님 출소하면 살 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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