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나의 송사] 김윤식 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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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알게 모르게 세대마다 좋아하는 아포리즘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고 있지 않겠는가.어떤 세대에 있어 그것은‘도이치 이데올로기’(1888)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사람은 가슴마다 라파엘을 갖고 있다’가 될 수 있다.

최고의 화가는 물론 최고의 농부·어부·학자·의사가 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이 무한한 잠재력을 완벽하게 발휘케 하는 사회야말로 도달해야 할 인류사의 목표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이란,지금‘점진적 사회공학’(칼 포퍼)의 처지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환각이며 황당무계한 것이지만,이상을 향한 목표가 없으면 사람은 “살 보람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죽을 수조차 없다”고 복창한 것은‘악령’(1872)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였고,그 의의를 일찌감치 미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저 늙고 꾀 많은 헤겔의‘미학강의’(1829)였다

그 직계인 청년 루카치는 불세출의 저작 '소설의 이론' (1916)의 첫 줄에다 이렇게 썼다.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만 할 길을 창공의 별이 지도의 몫을 하는 시대는 복되도다" 라고. 어째서, 언제 그 복된 시대가 끝장나고 말았는가. 어떻게 하면 그런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청년 루카치의 동공에 비친 것은 서사시와 소설의 변별성이었다.

삶의 온전함(본질)을 드러내는 형식임에는 양쪽이 같으나 전자가 갖지 않은 다른 한 가지 요소를 후자가 갖고 있지 않았겠는가.

시간이 바로 그것. 순금을 빼고 모든 것을 그 근본에서 망가뜨리는 것이 '시간' 이며, 이것이 형식과 더불어 주어졌을 때 탄생한 것이 '시민적 서사시' 로서의 소설이다.

본질은 절대로 찾아야 한다.

동시에 그것은 절대로 찾아지지 않는다' 는 것이 소설의 소재이기에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의 주인공이 문제아라는 것. 자기를 찾아 헤매다가 끝에 가서는 '이게 아닌데…' 하며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해 버리기.

여기에 근대소설의 운명이 있었다.

모든 것을 그 근본에서 망가뜨리는 이 시간이란 대체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이 물음엔 어떤 해답도 쉽사리 주어질 수 없겠으나, 그것이 인류사의 진행 방향과 무관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국민 국가라 해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라 해도, 혹은 근대라 이름지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데,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는 명제에 이들이 함께 수렴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명제(제작 모델)에 알게 모르게, 또 많건 적건 관련된 것이 이 나라 근대 문학이며 그 전개 과정이 문학사라고 믿어 온 세대가 있다.

보편성으로서의 국민국가.자본제 생산 양식의 건설과, 특수성으로서의 반제.반봉건 투쟁 등으로 정리되는 이런 항목들에 엄밀히 대응되는 것이 이른바 '시간' 이 잉태한 근대 문학이 아니었는가.

이 나라 근대 문학이란 이 속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없겠는가.

근대 문학의 공부가 인류사의 공부라 함은 이런 문맥에서며, 이 나라 근대사의 공부라 함도 이런 문맥에서다.

이 모든 것은 '시간' 에 내속(內屬)된,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 의 명제에 수렴된다.

인간의 위엄에 어울리는 그러한 표정과 그러한 형식, 그러한 품격을 갖추고자 하지 않거나 무관한 문학이란, 따라서 문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근대 문학일 수조차 없다.

항차 이 나라 근대 문학일까보냐.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이러한 믿음에 조금씩 회의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6월 항복' (1987)후였을까, 베를린 장벽의 무너짐(1989), 혹은 구 소련 해체(1991)이후였을까, 마침내 그 회의가 눈에 보이는 실체 마냥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또 언제였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1978)에서 난쟁이 가족이 그토록 괴로워했던 노사 문제도, '태백산맥' (조정래, 1989)에서 그토록 참담했던 이데올로기 문제도 어느새 퇴색하기 시작하지 않았겠는가.

90년대 작가군의 출현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외쳤다.

'인간은 벌레다, 연어다, 메뚜기다, 되새떼다' 라고. 처음엔 물론 조심스런 목소리로 '은어다!'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 1994)라고 속삭이다 이것이 꼬리를 물어 걷잡을 수 없는 형세로 확산됐다.

역사적 상상력이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현란하게 거기 꿈꾸어지고 있었다.

일찍이 헤겔은 나폴레옹의 예나 침공에서 역사의 끝장을 보았고, 그 직계 코제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그것을 보았고, 그 손자 격인 후쿠야마는 동구권의 해체에서 그것을 보았다.

대체 '역사의 끝장' 론이란 무엇이뇨. 주인.노예의 변증법의 폐기가 아니었겠는가.

인간의 주체성이 욕망의 그것이라면, 욕망이 소멸되었거나 쇠약해졌을 때 인간이란 새삼 무엇이겠는가.

한갓 생물이 아니고 무엇일까. 생물로서의 인간이란 무엇이뇨.

그런데 참으로 난감한 것은, 이 물음만큼 아득한 것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연어의 모천 회귀를 깡그리 설명할 방도가 있을까. 철새의 방향 감각에 대한 해명을 명백히 할 수 있겠는가.

DNA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질 수도 있을까. 이 모두는 시간, 곧 제작 모델에 대한 통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인간은 창조주다' 로 향하고 있는 이 상상력 앞에서 '인간은 가슴마다 라파엘을 갖고 있다' 의 명제란 얼마나 초라한가.

결국 이 초라함에로 수렴되는 생물학적 상상력이란 또 얼마나 허전한가.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 와 '인간은 벌레다' 의 두 명제 틈에 낀 세대만큼 난감한 경우는 없다.

무슨 공부가 이 세대에게 새삼 요망될까.

어떤 세대는, 이 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인간은 벌레가 아니지만 또한 연어이고 메뚜기라고. 그 어느 쪽도 황당무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문제는 그러니까 문학에 관련된다.

문학에 관련된 논의이기에 이번엔 문학이 입을 열 차례다.

이 경우 문학이란, 그러니까 구체적인 문학 곧 이 나라 근대 문학을 가리킨다.

민족어에서 이제 삶과 정서에서 유리된 인공어로 나아감이 문학적 필연성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통일 국가의 성립 후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

분단 현실을 그대로 둔 마당에서 제기되는 인간 물고기론이란 과연 어떠할까. 그렇지만 그것도 DMZ를 무화시킬 수 있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다면 어느 문학 세대도 승리할 것이다.

21세기에 대한 문학적 기대가 아주 황당무계하지 않은 것은 이처럼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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