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차분한 새천년 맞이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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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인은 산술적 합리성을 무시하고 서둘러 21세기를 맞이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20여일이 지나면 드디어 21세기가 시작되고, 아울러 뿌리쳐 떠나보내려 했던 20세기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수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루어냈지만 결국 시간이란 영역만큼은 U턴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다음 세기에 넘겼다.

그러므로 설사 우리가 저항한다 해도 21세기는 닥쳐올 것이고 20세기는 과거로 남게 된다.

근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새 천년 맞이 행사 가운데 한두 가지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궁금한 점이 있다.

우선은 새천년준비위원회의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포함된 '새천년맞이 향목(香木)찾기' 라는 행사다.

이 행사의 취지는 1천여년 전 우리 조상이 1천년 후 후손을 위해 어딘가 바닷가에 묻어둔 향나무를 발굴해 조상의 슬기를 전승한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향목이 묻혀 있음직한 바닷가 몇 군데가 선정됐으나 결국에는 이번 새천년맞이 행사기간 중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 바닷가에서 향목을 찾고, 발굴의 성패를 떠나 다음 새 천년을 위해 그곳에 향나무를 매장한다는 내용이다.

1천여년 전이면 고려 초기 목종(穆宗)연간이다.

당시에 서기력을 사용했을 리도 만무하지만 만약 선대인이 후손을 위해 향나무를 묻었다면, 해마다 묻지는 못할지언정 서기 2000년을 맞이하는 후손을 위해 단 한번만 묻었을 리가 없다.

문헌에 있는 대로 향목에 대한 기록이 물리적 사실이라면 우리는 해마다 1천년 전의 향목을 발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새천년맞이 향목찾기' 가 기왕 조상의 슬기를 전승하고 보존하자는 의미에서 비롯된 행사인 바에야 그 의미를 심화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향목의 의미가 단순히 불상을 깎거나 상서로운 일에 이용하는 구체적 물질이라기보다는 장구한 안목과 헌신적 실천을 권고하는 선인의 지침이요, 경박부조와 부화뇌동에 대한 경계의 금언으로 전달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둘러 21세기를 맞이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은 무엇인가□ 새 천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막바지에 이르러 소란스럽고, 장래에 대한 전망과 풍문이 횡행하는 요즘 새 천년의 주인공인 우리 각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우리의 진정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민 3분의 1이 올해 마지막 날 동해안을 비롯한 각지의 바닷가로 몰려가 해맞이를 하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해안 숙박업소는 비싼 가격임에도 진작에 예약이 만료됐다고 한다.

국가경제가 어렵다거나, 극심해진 빈부격차로 위화감이 팽배하다거나, 다시 연탄을 때는 빈민층이 늘어나 연탄가스 중독사가 재연되고 있다는 어두운 면을 들추며 해맞이 행사의 취지를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 가운데는 알뜰살뜰 경비를 마련해 해맞이 관광열차를 타겠다는 소박한 계획을 세운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모처럼 가족이 어울려 새 천년 첫날의 일출을 보겠다는 서민들의 여행을 섭섭한 말로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새 천년을 맞이하는 자세만큼은 주위의 소란과 분주를 피해, 공연히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서 새로운 무언가를 담을 여유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떠오르는 해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한번쯤 나 자신을 살펴보고 이웃을 되돌아보며, 기대에 찬 환호보다는 냉정한 반성으로 오고 가는 세기를 점검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환멸의 감정이든 회한의 감정이든 우리가 떠나보내는 지난 1천년은 인류 역사상 대단한 격변과 진보의 시간이었다.

엄청난 과학문명의 발전만이 아니라 '인간' 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보했고 '나' 라는 개인의 가치를 규명한 시간이었다.

혼돈과 신화의 시대를 벗어나면서 맞이한 신과 권력의 세기를 지나, 지난 1천년 동안에는 이성과 합리성이 떠받치는 인간 중심의 세기를 거쳐 급기야 인간 중심의 이성주의마저 떨쳐버리면서 탈인간중심, 범존재중심의 미래로 나아가는 사상적 진보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물며 우리가 산술적 시간 단위의 변동에 일희일비하고, 한낱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겠다고 부화뇌동한다면, ' 우리가 이룩한 문명과 사상은 우리를 ' 태양숭배주의마저 떨쳐버리지 못한 혈거부족에 비유될지도 모른다.

지난 세기가 그러했듯 새 천년에도 이 세상은 태양의 광명과 온기만이 아니라 어둠의 암흑과 냉기가 우리와 함께한다.

해는 날마다 떠올라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전존재를 비춘다.

그리고 해가 지면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올해 마지막 날 나는 오늘 내가 있는 이 자리에 앉아 차분한 마음으로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되새겨볼 계획이다.

소설가 심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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