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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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2) 알다모를 吳수석

나는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레이저 무기와 야시(夜視)장비 개발을 주관해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레이저는 무기로 활용돼야 합니다. 아무리 민간 과학자들이 우수해도 무기에 관한한 군인의 감각을 따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업은 꼭 ADD가 맡아야 합니다. "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청와대와 국방부 관계자들이 내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지한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랫 배에 힘을 잔뜩 주고 브리핑을 계속했다.

"당장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레이저 무기부터 하나하나 개발해 나가겠습니다. 개발 비용은 최소화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바로 그때 오원철(吳源哲.71)경제2수석이 특유의 괄괄한 목소리로 갑자기 내 말을 가로챘다. "韓박사, 레이저 무기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 좀 해 봐. " 평소 吳수석의 스타일로 보건대 그의 이같은 주문은 자신이 대단한 관심과 호의를 보일 때만 쓰는 말투였다.

그를 오랫동안 접촉하면서 터득한 나만의 감각이었다. 자연히 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탱크병이나 포병이 적 탱크를 명중시키려면 거리를 신속.정확하게 측정해야 합니다. 기존의 거리 측정기로는 아무리 빨라도 10초가 걸립니다. 또 포탄이 날라가는 2~3초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적의 포탄에 먼저 맞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레이저로 거리를 측정하면 1만분의 1초 밖에 안 걸립니다. "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레이저 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느닷없이 吳수석이 내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태양 에너지가 어느 정도 지구에 들어 오지?" 질문의 요지인즉, '지구에 전달되는 태양에너지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는 것으로 다분히 내 실력을 시험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 2년간 천체물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대기권 밖에서는 1평방m 당 1.4㎾가 들어 옵니다. 그러나 대기권을 통과할 때는 대기권이 태양에너지를 흡수하기 때문에 1㎾로 줄어듭니다. "

吳수석은 나의 시원스런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그거 굉장한 양인데…. 잘 이용해야겠어" 하며 알듯 모를듯한 말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 브리핑을 들으며 앞으로 닥칠 에너지 위기에 대비, 태양에너지 활용방안을 구상했던 모양이다. 당시 정부는 중동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에너지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아랍 산유국들은 이미 67년 '6일 전쟁' 때부터 석유를 무기화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브리핑 한 시점은 73년 10월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기 불과 9개월 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吳수석이 레이저 얘기를 들으며 태양에너지를 떠올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아무튼 이날 브리핑은 대성공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73년 5월 국방과학연구소에 '레이저및 야시장비 연구실' 이 신설됐다.

물론 실장에는 내가 임명됐다. 1년 예산도 5천만원 정도가 배정됐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는 달리 레이저 무기를 본격 개발할 수 있도록 나에게 모든 권한이 주어진 건 아니었다.

실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나흘 뒤 심문택(沈汶澤.98년 작고)국방과학연구소장이 나를 불렀다. "레이저실 예산 가운데 4천8백만원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원자력연구소에 용역을 주게. 자네는 관리만 맡아. 나머지 예산으로 다른 나라 실정이 어떤지 조사나 좀 하지. " 순간 화가 치밀었다.

레이저실 실장으로 임명해 놓고 정작 레이저 무기 개발은 다른 곳에 맡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소장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럴바엔 차라리 레이저실을 만들지 말았어야죠. 그렇게는 못 합니다. " 나는 이렇게 따지며 대들었다.

沈소장은 누구 앞에서나 바른 말을 하는 내 성격을 알고는 나를 달랬다. "자네 심정 알아. 하지만 이건 吳수석 지시라네. " 그 말을 듣자 더 오기가 생겼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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