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정취 거의 없어졌는데 … 뭘로 피맛길 보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종로 2가의 서피맛골은 문을 닫은 음식점이 많아 옛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김태성 기자]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로6가 뒤편 피맛길. 폭 2~3m의 좁은 골목에 ‘○○여관’ ‘○○모텔’ 등의 간판이 빼곡하다. 일명 ‘여관거리’다. 낡은 건물벽에는 광고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머리 위로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19일 서울시가 발표한 ‘피맛길 보존계획’ 대상 지역의 일부다. 서울시는 고유의 분위기가 퇴색해 가고 있는 피맛길을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시대 상황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의 명물거리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우선 2010년에 종로2~3가에 27억원을 들여 전신주·광고물을 정비하고 구간별로 특성에 맞게 분위기를 살릴 예정이다. 2011년에는 종묘~종로6가 피맛길을 정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상인과 시민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종로6가 피맛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6)씨는 “온통 여관뿐이고 특별히 볼거리도 없는데 뭘 보존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종로2가 서피맛길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때 40여 곳의 음식점과 주점이 서민들의 애환을 어루만졌지만 현재는 입구에서부터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더미가 행인을 맞이한다. 현재 서피맛골 주점촌에는 김씨를 포함해 4곳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 대부분의 가게는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다.

이곳에서 40여 년째 주점을 운영하는 김모(70)씨는 “불이 자주 나고 시설이 낡아 상인들이 5~6년 전부터 하나둘씩 빠져나가 손님들이 그리워하는 ‘손맛’은 찾기 힘들다”며 “고유한 분위기를 어떻게 살리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의 가게를 대학 때부터 찾았다는 황상준(35·건축업자)씨는 “새로 지은 깔끔한 건물 안에 간판만 ‘열차집’ ‘골목집’으로 달아놓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20여 개의 음식점이 있던 종로3가 동피맛길에도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은 3곳뿐이다. 대신 음식점이 있는 자리를 비디오방·컴퓨터방·당구장 등이 차지하고 있다. 시어머니에 이어 2대째 17년간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54)씨는 “5~6년 전부터 오락실 등이 들어오며 아무 특징 없는 거리가 됐다”고 말한다. 이씨는 “청진동처럼 큰 빌딩(르메이에르 빌딩)을 짓지 않는다는 얘기겠지만 생색내기용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정유승 도심재정비1담당관은 “피맛길의 ‘길의 원형’을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그는 “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을 막자는 것이지, 주변 건물을 보존하자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고유한 분위기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대해 정 담당관은 “현재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지만 업종 변경을 강제하기는 쉽지 않다”며 “어떤 분위기로 만들어야 할지 정해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용역 결과가 나오는 내년 3월까지 기다려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도시생태를 다룬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의 저자 홍성태(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철거 중심의 대규모 개발을 지양한다는 점에서는 환영하지만 골목 자체의 역사성을 살리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는 종로1가의 피맛길을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단위 개발했다”며 “이제라도 피맛길에 녹아있는 역사성과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단순히 간판을 바꿔 다는 대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고증을 거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주리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피맛길=서울 종로1~6가의 큰 건물 뒤로 이어진 폭 2~3m의 뒷골목. 조선시대 종로 시전거리를 지나는 백성들은 양반들의 말이 지날 때마다 길가에 엎드려 절을 해야 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한 뒷길이라 해서 ‘피맛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음식점·주점 등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