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운하 과거와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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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길목인 파나마 운하의 역사적 반환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미국은 오는 31일 정오(현지시간)를 기해 전세계 1백44개 항로를 연결하고 연간 1만4천척의 선박이 통과하는 운하 관리권을 파나마 정부에 정식으로 넘겨주게 된다.

77년 체결된 미국-파나마 협정에 따른 조치다. 미국은 못내 아쉬워하고 있고 파나마는 주권회복의 자긍심과 예상되는 경제적 이득으로 가슴 부풀어 있다.

◇운하의 역사〓1821년 콜롬비아의 속령으로 편입됐던 파나마는 운하 건설을 추진하던 미국을 등에 업고 1903년 독립을 성취했다. 대가로 전체 국토면적(7만8천2백㎢)의 5%에 달하는 주변지역 관리권을 미국에 넘겼다. 1911년부터 운하 건설이 시작됐고 미국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 미군을 주둔시켰다.

중국인 인부 등 7천여명의 기술자.노동자가 투입돼 3년 뒤 완공된 파나마 운하는 세계 최대의 토양댐과 인공호수,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뤄져 있다. 총연장 80㎞의 수로와 주변의 전략요충지 1천4백26㎢에 대한 경비와 관리권은 미국이 행사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파나마측으로부터 운하 관리권 반환 요구가 거세졌다. 이같은 요구에 굴복,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관리권 일체를 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이관하는 데 합의했다.

◇ 미국의 고민〓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손을 뗄 경우 파나마 운하의 실질적 지배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97년 홍콩의 실업가 리카싱(李嘉誠)이 이끄는 허치슨 왐포아 그룹이 운하 양쪽 입구의 발보아항과 크리스토발항의 운영권(30년)을 파나마 정부로부터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리카싱이 중국 정계 및 인민해방군 고위층과 각별한 관계여서 미국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최악의 경우 중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미국도 운하를 사용할 수 없게될지 모른다고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걱정하고 있다.

또 하나의 우려는 미군이 파나마에서 철수함으로써 중남미를 중심으로 펼쳐온 마약퇴치 전략에 차질을 빚게 됐다는 것이다. 파나마의 하워드 미 공군기지는 그동안 콜롬비아 등 남미의 마약생산국에 대한 미국의 감시작전본부로 활용돼 왔다.

클린턴 행정부는 마약퇴치를 위해 미군의 파나마 항구 주둔 협상에 나섰으나 파나마측에서 과도한 주둔비용을 요구해 결렬됐다. 결국 미국은 마약 작전기지를 남미의 에콰도르와 카리브해의 군사기지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 파나마의 야심〓파나마를 '라틴아메리카의 싱가포르' 로 부각시킨다는 계획이다. 연간 물동량이 세계 전체 물동량의 4%(2억2천8백만t)에 이르는 파나마 운하는 현재 선박 척당 평균 3만4천달러의 통과세를 부과, 연간 6억5천만달러(약 7천8백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파나마 정부는 최근 파나마 운하의 물동량 증대와 서비스 개선을 위해 운하시설을 대폭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운하의 직접 관리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다.

일각에서는 파나마가 관세를 급격히 인상하거나 수익금을 시설개선을 위해 재투자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있다.

파나마측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군 철수로 인해 직장을 잃게되는 지역주민들로 현재 13%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이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콜롬비아 국경인근인 다리엔 정글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는 콜롬비아 반군 문제도 골칫거리다. 정규군이 없어 이들을 대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 관련 일지>

1903년 파나마 독립

1911년 미국, 운하 건설 시작

1914년 파나마 운하 완공

1977년 미국-파나마 운하 반환협정 체결

1998년 미군 파나마 항구주둔 협상 결렬

1999년 '8월 미 하워드 공군기지, 포트커비 기지 철수

'11월 포트클레이턴 기지 철수

1999년 12월 31일 정오 파나마운하 공식 반환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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