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가수호집단'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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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 나라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다. 어디 '옷로비' 사건뿐인가. 파업유도.언론문건.호프집 화재.맹물전투기 등 우리 사회는 각종 스캔들, 부정부패와 연루된 대형사고, 음모.대결.폭로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이 나라에는 플라톤이 강조한 '국가수호집단' 이 없다. 플라톤은 가정도 등져가며 가혹한 자기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키는 지극히 엄격하고 이상적인 파워엘리트의 윤리를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선진국일수록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한 파워엘리트가 나라를 안정과 발전으로 이끌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과 검찰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 아닌 추태를 보면 국가수호자다운 파워 엘리트가 과연 몇이나 되느냐는 강한 회의가 일어난다.

민주주의도 다수 아닌 소수 파워엘리트에 의한 통치다. 유명한 유럽 사회주의 운동권 학생출신의 정치사회학자 로버트 미첼도 파워 엘리트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급진 사회주의를 비롯한 모든 체제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경우 전 인구의 1% 중에서도 0.002%에 불과한 5천7백78명의 파워 엘리트가 겸직하면서 7천3백14개에 달하는 여러 분야의 핵심위치를 장악하고 있다.

문제는 파워 엘리트의 지배구조 자체 보다 그들이 파워를 행사하는 방법에 있다. 미국의 경우 파워 엘리트는 반드시 음모조직이 아니며, 국민의 행복에 큰 관심을 갖고, 사회불안이 일어나면 그 책임이 바로 자신들에게 있다는 점을 통감한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그들은 국민의 신뢰 위에서만이 권력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펜타곤 페이퍼 사건의 경우 국가기밀 보호 필요와 국민의 알권리 간의 대결에서 후자가 승리한 것도 이런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의 파워 엘리트는 몇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첫째, 육체는 현대에, 정신은 과거에 살고 있다. 자신들이 독재와 부정부패 등으로 얼룩진 암울한 과거의 산물임을 망각하고 있다. 독재에 저항한 자들도 바로 그 투쟁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권위주의 정치문화에 길들여졌다. 정치학자 루시안 파이의 지적과 같이 제3세계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할 수는 있어도 권력의 민주화를 성취하는 예가 드문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과거에 통하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은 이제 비교적 열린 시민사회의 감시를 받고 있다. 비밀과 은폐의 '수명' 도 단축되고 있다.

둘째, 권력행사의 기본적 태도로서 가치와 규범을 존중하려는 의지는 없고 권력유지와 확대 방법에만 전념한다.

'옷 사건' 이 보여주듯 빨리 끝날 일도 증폭되다 파국을 빚는 것은 권력행사의 목적인 보편적 가치와 규범의 추구보다 권력 자체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셋째, 파워 경쟁과 유지에서 핵심적 패턴의 하나는 배타적 연고주의다. 지연.학연 등은 상식적인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상호간에 'No(거절)' 를 어렵게 한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대통령은 권력의 행사에서는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넷째, 개혁의 의지가 형식적이다. 개혁이란 권력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파워 엘리트는 개혁을 외치면서도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에 더욱 집착하는 모순을 범한다. 따라서 권력행사의 정직성.공정성.투명성.효율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권력의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강화하려는 세력은 줄고 권력을 비민주적으로 향유하려는 세력이 비대해지면서 개혁은 좌초하게 된다. 개혁을 표방한 새 정권은 이래서 실패한다.

국제사회의 도전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란 파워 엘리트가 공정한 규칙을 정착시켜 사회 전반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의 파워 엘리트가 '위에서 아래로' 의 방식으로 주도하면서 국가들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는 파워 엘리트 자신들이 공정한 규칙을 육성하기는커녕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맞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현상대로라면 경제가 겨우 회복세로 돌아섰다지만 위기는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다. 파워엘리트는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새삼 통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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