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에른스트 크리스 외 '예술가의 전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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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박남철의 '시인연습' 이라는 시에는 "나도 한때는 시인이고자 했었노라, ㅎㅎㅎ/굉장히 열심히 세수도 않고 다니고/때묻은 바바리 코우트의 깃을 세워 올리면서/봉두난발한 머리카락의 비듬을 자랑했거니/…/무엇인가 비웃는 듯한 미소를/하시라도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먼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하늘과/바람과 별과 시만을 바라보는/내 순수 고독의 시선하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이 시인에 대해서 갖는 일반적인 환상에 대한 재치있는 풍자를 담고 있다.

시인이든 화가이든 이른바 '예술가' 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들 대부분은 유사한 내용의 선입견을 지니고 있다.

예술가들은 대개 차림새가 지저분하고 괴팍스럽고 오만한데다 종종 그 특출난 예술적 재능이 불러일으키는 광기에 사로잡혀 엉뚱한 기행을 저지른다는 식의, 요컨대 세속적인 삶과 구별되는 어떤 일탈, 혹은 외경의 이미지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전설' (사계절 펴냄)에 따르면, 예술가들에 대한 이러한 정형화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확대 재생산해내는 것은, 이른바 '예술가의 전설' , 즉 예술가들을 둘러싼 각종 일화와 전기(傳記)류의 담론들이다.

이러한 담론들은 물론 예술가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에 의해 생산 유포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가에 대한 전기물들에서 우리는 예술적 천재의 삶을 신비화하기 위한 일화들, 이를테면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하던 한 예술적 천재가 한 조력자와의 우연한, 그러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꽃피우게 된다던가, 그림 속에 그려진 포도송이가 진짜인 줄 알고 새가 날아들었다든가 하는 류의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숱하게 만나게 된다.

'예술가의 전설' 은 주로 화가들의 삶을 통해 예술가들 주위에서 신비로움의 분위기를 발산하는 이러한 전설들이 지니는 사회심리학적 배경을 흥미롭게 분석해내고 있다.

이러한 전설들은 말 그대로 전설, 혹은 신화와 동일한 차원의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다. 중요한 것은 그 전설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혹은 사실로 믿게 만드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다.

기실 예술가에게 부과된 이와 같은 외경과 신비의 이미지는 예술가가 지녀왔던 특수한 사회적 위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문제는 지금의 우리가 무차별적으로 밀어닥치는 상업주의의 물결 속에서 예술의 진정성은 타락하고 더불어 가난하고 불우한 예술가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그 신비스런 예술가의 초상마저 하나의 값싼 상품 이미지로 전락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혜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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