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시대의 러시아] 上. 넘치는 '오일머니' 러 경제회복 '기름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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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러시아가 횡재를 했다. 최근 원유값이 치솟으면서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 러시아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요즘은 외채 상환일정도 꼬박꼬박 지킨다. 언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선언을 했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아직 서민들의 생활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고유가 시대를 맞은 러시아의 경제.정치.사회상 변화를 2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70년대 이래 20여년 만에 찾아온 오일달러의 위력에 러시아 경제가 변화의 힘을 얻고 있다.

러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국제원유가 폭등에 따라 러시아로 새로 유입되는 외화는 매달 최소 10억달러에 이른다. 월평균 수출량 1천1백만t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1월엔 약 7억달러를 벌어들인 반면 8월엔 14억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이렇듯 원유가의 변동폭이 커 앞으로 얼마나 더 벌어들일 수 있을지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최대 재정수입원인 석유.가스업계의 순익이 좋아지면서 러 정부의 재정에도 여유가 생겼다. 에너지담당 부총리인 니콜라이 악쇼넨코 제1부총리에 따르면 러시아의 연료 에너지 산업부문이 러시아 전체 외화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 특히 매년 재정수입의 20% 이상을 석유에너지 업계가 담당한다. 그러나 올해는 원유가 상승으로 이 비율이 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말 러 정부가 99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국제원유가에 대해 배럴당 14달러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만 해도 정부는 재정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장부상으로 기름값을 올리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당시 실제 원유가는 배럴당 10달러선을 밑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름값은 4월에 이미 16달러를 돌파했고, 11월 들어서는 자고나면 거의 1달러씩 올라 30달러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자 러 정부는 각종 수출세를 신설, 석유.가스업계의 이익을 잘라가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신설된 석유수출세는 현재 t당 7.74달러. 석유관련 제품에도 t당 10~20유로(약 61.95달러)씩의 수출세가 부과된다. 천연가스 수출세도 t당 10유로에서 60유로로 5백%나 인상됐다.

컨설팅회사인 '유니파이드 파이낸셜 그룹' 의 석유분석가 드미트리 아브데예프는 정부가 이러한 세금신설 및 인상으로 최소 1억1천만달러의 추가수입을 확보했다고 추정했다. 또다른 전문가들도 러 정부가 세금인상 덕분에 지난 3개월 동안에만도 4억5천만달러의 추가 재정수입을 얻은 것으로 분석했다.

지난 9일 러 국세청은 개청 이래 처음으로 지난 10개월 동안의 징세(徵稅)실적이 당초 예상보다 무려 4백60억루블(17억6천만달러)이나 추가됐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선거를 앞두고 기업들의 탈세를 함부로 적발해내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결국 추가 징수액은 석유세 등 원유가 상승에 의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유가상승으로 투자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러 원유산업에 투자하려는 외국기업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진 것이다. 시브네프트.루코일 등 대형 정유사들의 주식은 연일 상종가다. 또 저유가 시대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유정(油井)을 폐쇄하거나 외국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종이값 수준으로 주식을 경매하려 했던 많은 유전들이 이제는 팔려고 내놓았던 주식들을 다시 거둬들이는 등 업계 상황도 변하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수익 덕분에 정유사 사원들의 복지수준도 향상되고 있다. 최대 정유사인 유코스사는 최근 종업원들과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이나 아파트를 지어 무상 혹은 저가로 제공하는 등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복지예산을 늘렸다. 그래서인지 기름값이 1달러 올라갈 때마다 러 경제의 고통거리는 10가지씩 경감된다는 말이 유행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러시아의 9월 실질소비자 지출은 지난 2월에 비해 전혀 늘지 않았다. 원유가 상승이 관련 업체를 제외하고는 일반 서민들의 실질임금 상승 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내 석유소비량을 줄이고 수출량을 늘리려다 보니 러시아 국내 유가 인상으로 서민들의 부담이 커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체첸전 등 현안들도 정부가 시장에 돈을 풀지 못하는 요인이다. 따라서 고유가가 러시아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앞으로 총선.체첸전 등 정치.사회적 요인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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