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은행가 '고용계약제 한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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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연말을 앞둔 은행가에 '고용계약제' 가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이미 지난 10월부터 국민은행이 자발적으로 1급 직원 중 일부에 대해 고용계약제를 적용한 데 이어 연말까지 한빛.조흥은행이 금융감독위원회와 맺은 '경영정상화계획' 에 따라 각각 1~3급, 1급 전원을 대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고용계약제란 말 그대로 기한을 정해 고용계약을 갱신해가는 제도. 급여만을 성과에 따라 일부 차등화한 '무늬만' 연봉제가 아니라 고용계약 자체를 해마다 재검토하는 명실상부한 서구식 연봉제다.

상당한 구조조정을 거쳤다지만 아직까지도 연공서열, 호봉승급식 고용문화에 익숙한 국내 은행들로선 넘기 힘든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와 또다시 맞닥뜨린 셈.

경영진과 정부는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 "역행할 수 없는 시대적 추세" 라고 주장하지만 각행 노조와 금융노련은 "파업도 불사하는 투쟁을 벌이겠다" 며 맞서고 있어 잔뜩 긴장이 고조된 상태다.

◇ 고용계약제 어디까지 왔나〓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국내 은행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영혁신을 이루겠다" 는 의지를 표명하는 차원에서 연봉제 도입을 속속 서둘러왔다.

하지만 이미 대규모 정리해고의 고통을 겪은 노조원들의 강력한 반발을 우려, 급여만 다소 조정하고 고용계약은 문제삼지 않는 '반쪽짜리' 연봉제 도입에 머무른 게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국민은행이 비록 1급 전체(1백56명)는 아니나 본부 부서장 및 본부직할 지점장 41명에 고용계약제를 시행하는 '사건' 이 벌어졌다.

"노조를 의식해 일부로 시작했지만 세계 추세를 감안할 때 점차 전체로 확대해나갈 수밖에 없다" 는 게 은행측 주장이다.

국민은행은 자발적으로 모험을 감행한 반면 한빛.조흥은행은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받은 죄(?)로 선두주자로 나서야 하는 입장. 두 은행은 올초 금감위와 맺은 약정에서 각각 다양한 경영 목표치와 함께 연말까지 일부 직급에 대해 고용계약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조흥은행은 이미 지난 12일 약정 수정작업을 통해 도입일정이 확정됐으며, 한빛은행은 끊임없이 "일정을 미뤄달라" 고 요청하고 있으나 조흥은행과의 형평을 고려할 때 최소한 1급에 대해선 예정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 불붙은 노조 반발〓금감위는 공식적으론 고용계약제란 은행측이 알아서 약속한 사항일 뿐 정부가 강요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다.

하지만 "엄청난 국민세금이 들어간 은행들이 제대로 경영혁신을 해나가는지 사후감독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게 은행들의 전언. '정부가 은행권의 '뜨거운 감자' 인 서구식 고용계약제를 두 은행을 필두로 확산시켜 보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금융노련은 최근 공식성명을 통해 "노사합의 사항을 사전 협의 없이 경영진과 금감위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며 즉각 반격에 나섰다.

또 각행 노조도 "비록 처음엔 노조원이 아닌 상위직급에 대해서만 시행한다지만 일단 한 부문이 무너지면 전체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 라면서 "가뜩이나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당한 은행권에 또다시 고용불안을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금융노련 관계자는 "향후 사태 추이를 보아가며 일단 은행 경영진을 상대로, 다음엔 정부를 상대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연대투쟁을 벌여나갈 방침" 이라고 밝혔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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